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해구 (문단 편집) == 역사 == [[조선시대]]에는 진해현이 아닌 '''웅천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정작 진짜 [[진해군|진해현]]은 바다 건너 [[마산합포구]]의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에 해당한다. [[1896년]] [[웅천군]]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08년]] 창원부에 통합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1912년]] 구 [[웅천군]]에 해당하는 지역 중 웅중면 일부와 웅서면을 통합하여 진해면을 신설했다. [[일본 한자음]]으로는 친카이(鎮海)로 불렸는데, 바다를 진압한다는 한자 뜻이 해군도시를 건설하려던 [[일본인]]들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남아 원래 진해였던 곳은 본래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현 진해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굳어져 버렸다. 구 진해현은 진동, 진북, 진전 3면을 아울러서 '[[삼진]]'으로 불리기도 한다. [[1910년대]]에는 [[구레시|구레]], [[요코스카]], [[사세보]] 등이 속한 [[일본 제국]]의 전략상 주요한 8대 군항 중 하나로 취급되었다. [[한반도]]에서는 가장 큰 해군도시로 성장했으며, 이 명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진해라는 도시는 사실상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라 할 수 있다. 원래 진해 구시가지 지역은 10개 부락 정도가 분포한 논밭이었다. [[일본 제국]]은 대륙 진출의 발판을 삼기 위해 [[부산]], [[마산]], 진해 등 [[한반도]] 남부 항구도시를 넘나들었다. 진해에서도 [[일본 제국 해군]] 수병들을 보내 토지측량을 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토지 주인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원래는 더 내륙 쪽의 신마산이 [[일본인]] [[조계지]]여서 그 인근[* 현 월영동 일대의 [[러시아]] 조계지를 차지하고 [[일본 제국 육군]]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일본인 조계지 북쪽을 매립하여 현재의 제1-중앙부두를 만들었다.] 군사용지로 개발했으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이후[* [[러일전쟁]] 이후 이때 탑산에 승전탑을 세웠다.] [[한반도]]에서 눈치볼 세력이 없어진 이상 마산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게 된 [[일본 제국|일제]]가 더 외항에 가까운 진해에 계획 군사도시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해군]] 기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1930년대]]까지는 신마산의 발전이 약간 정체를 겪게 된다. 일제는 [[유럽]] 등지에서 배운 건축기술을 접목시켜 해군기지의 배후지 역할을 할 도시 건설을 계획했다. 그래서 기존의 주민들을 진해 동부 쪽으로 강제이주시키고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진해로 이주하기 시작한 주민들에게는 진해의 시가지 개발 계획이 기재된 잡지가 배포되었고 [[행정구역]]은 [[일본어]]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당시 기존의 마을 근처에 있던 700년 나이의 [[팽나무]] 고목[* [[8.15 광복]] 이후 [[6.25 전쟁]] 중에 이 팽나무는 수명을 다하고 죽은 것으로 알려져있다.]을 중심으로 중원로터리가 만들어졌고 시가지가 이때부터 조성되어 전체적인 형태는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진해구 내에 보존되고 있는 근대건축물이 전부 이 시기에 지어졌다. 한반도 내 최초로 건설된 [[계획도시]]로 철저히 일본의 입맛에 맞춰서 만들어졌다. 건축자재는 대부분 일본에서 직수입 했다. 당시 시가지가 조성되고 나가야(長屋)라고 불리는 일본식 2~3층 연립 주택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당시 그 명칭을 따서 당시 에비라야마(現 고철산) 동쪽의 해안의 명칭을 "나가야 해안"으로 지정하며 진해는 본격적으로 해군도시의 중심지로서 거듭나게 된다. 당시 나가야 해안을 중심으로 동부쪽(現 진해작전사령부 매립지)에 대규모의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군함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건설했다.[* 이 항구는 광복 이후에도 꾸준히 유지되다가 [[1980년대]]부터 진해에 대규모의 [[간척]] 사업이 이루어질때 철거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러일승전기념탑.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진해신사 입전.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진해신사 본관.jpg|width=100%]]}}} || || '''쓰시마해전기념탑[br](日本海海戦記念塔)''' ||<-2> '''진해신사(鎮海神社)'''[* 우측사진은 [[1936년]] 8월에 진해에 위치해있던 이시카와 사진관(石川写真館)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 [[일본 해군]]은 [[쓰시마 해전]]의 승전을 기념하고자 제황산, 당시 명칭으로는 카부토야마(兜山)로 불리던 산의 정상을 깎고 그 자리에 승전기념탑을 세웠다.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탄 [[일본 해군]] 기함 [[미카사(전함)|미카사]]의 [[마스트]]를 형상화한 탑이었다.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의 지시로 철거되었고 이후 [[박정희]]가 그 자리에 [[백두산함]]의 마스트를 형상화한 진해탑을 세웠다. 탑 자체는 철거되었지만 바닥 부분과 계단, 배수로는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탑 완공 당시 지역유지들에게 축소 모형을 나눠줬는데 현재 마지막 남은 한 개가 진해탑내 진해역사관에서 소장중이다. 또한 [[1916년]] [[6월 2일]], 일본은 제황산 공원의 남쪽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토요우케비메를 제신으로 하는 진해신사를 건설하였으며, 신사 내부와 건물은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 후 남아있던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된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해당 장소는 남산초등학교가 들어서있다. 한편, 시가지 주변의 [[행정구역]] 명칭이 변경되긴 했어도 현재 진해 중부권 지명의 대부분은 당시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현재 덕산동, 풍호동, 장천동은 당시에도 德山里(토쿠산리), 豊湖里(호오코리), 將川里(쇼오센리) 등 일본식으로만 읽었을 뿐 한자명칭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대죽도(다이치쿠토), 소죽도(쇼오치쿠토)라는 명칭 또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은 광복 후에 옛날 지명으로 복구되었고 새로운 명칭이 부여됨으로써 현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931년]]에는 진해읍으로 승격하고, 광복 후 [[1955년]]에는 다시 진해읍이 진해시로 승격했다. 이후 [[1973년]] [[창원군(행정구역)|창원군]] 웅천면을 관내에 편입, [[1983년]] 창원군 웅동면을 편입 후 [[2010년]] 마창진 통합으로 [[창원시]] 진해구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