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징비록 (문단 편집) == 비판 ==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懲毖錄)》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譏弄, 놀림)하였다. >---- >[[http://sillok.history.go.kr/id/knb_14005001_002|선조 수정 실록 41권, 선조 40년 5월 1일 계해 2번째 기사 유성룡 졸기 中]] 일부에선 징비록에 정작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나 저자 자신에 대한 자성의 내용은 부족한 것 아니냔 비판도 한다. 이를테면 류성룡 자신에 대한 반성이 일정 부분 결여되어 있는 점이 대표적인 예. 류성룡은 의외로 우유부단한 면이 좀 있어서, 이순신의 2차 백의종군을 부른 어전 회의에서 왕의 원균에 대한 편애와 당시 조정의 분위기에 휩쓸려 이순신 모함에 가담한 일이 있었는데,[* 이순신을 증오하고 원균을 띄워주는 선조 앞에서 이순신의 과가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한다. 노골적인 모함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애초에 적을 맞아 싸웠을 뿐인 이순신에게 과오를 운운하는 일 자체가 당시 기준으로도 불합리한 일이었다.] 가장 반성해야 할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정작 기록이 별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이순신을 살리기 위한 교책이었다는 반론도 있는데, 당대에도 류성룡이 이순신과 친밀하다는 사실은 유명했으므로 이순신을 증오한 선조 앞에서 잘못 두둔했다가는 진짜 이순신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랬다는 것. 이후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하자 이전처럼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또한 류성룡은 임진왜란 전에 이순신, 권율과 더불어 원균을 추천하였는데, 원균은 경상 우수사가 되기 전 더 낮은 직위를[* 계급은 같지만 좀 더 규모가 작은 전라좌수사(다름아닌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이 맡았던 자리다)에 있었다.] 받았을 때도 평이 좋지 않아 취소된 상황이었다. 이후 전쟁 기간 동안 원균의 잘못된 전쟁 수행으로 얼마나 심각한 손해가 생겼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 이런 인사상의 오점에 대해서도 별다른 기록이 없다. 3명 중 2명은 잘 추천했는데, 잘못 추천한 나머지 1명 때문에 혹평을 받는 건 부당하다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조선 정부 입장도 마찬가지다. 조선 정부는 무능했고 민초들이 정부가 싼 똥을 다 치웠다는 통념과 달리, 조정에서는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전쟁준비를 하려고 했고 그것을 비협조로 일관한건 지방 양반들과 백성들이었다. 경상도에서는 유생들까지 동원하며 열성적으로 전쟁준비를 했던 관리를 지방 양반들이 폭정을 일삼는다며 상소를 올렸고, 전라도에서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노역을 부과했다는 이유로 민란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조정에서 잘한 점이 있을지라도 못한 부분을 혹평하는 것까지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이것은 류성룡도 마찬가지다. 한편 익히 알려져 있듯 1591년 황윤길과 김성일이 사신으로 다녀와 왜군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일 때, 류성룡은 '침략할 리가 없다'는 김성일 측 의견을 지지했다. 여기까지는 김성일이 나중에 '황윤길의 말이 지나쳐 일부러 반대로 말했다'고 했더라는 식으로 적고 있다. 문제는 히데요시가 보낸 국서 내용[* "거리낄 것 없이 한번 뛰어 명나라로 곧장 들어가 우리나라 풍속으로 중국 4백여 주를 바꾸어 놓고 천자의 도성에서 정치와 문화를 억만 년 베풀어 보고 싶은 마음이 내 가슴 가운데 있으니, 귀국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들어가 준다면 장래에는 희망이 있을 것이요 눈앞에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을 명나라에 알릴지 말지에 대한 논의에서, 실제로는 알리지 말자고 주장하며, '무조건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 윤두수와 대립각을 세웠는데, 징비록에는 '이산해 등이 보내지 말자고 했고 나는 무조건 알려야 된다고 했다'는 식으로 적어 놓았다. 즉 반성을 주제로 하였으면서도 스스로의 과오는 숨긴 부분이 존재하는 기록물이니, 일정한 교차 검증을 통해 기록되지 않은 류성룡의 과오·판단 착오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 당시의 시대상이나 문화 풍토를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곤란한 측면이 있기 때문. 다만 이후 조선에선 징비록이 군사 기밀 유출을 이유로 금지되었고 일본 쪽에서도 활발히 간행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류성룡 본인과 직접 관련된 서술이 아닌 부분의 신뢰도는 높다고 간주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지나치게 당색을 드러낸다는 비판도 있다. 예로 들면 징비록에선 [[제2차 진주성 전투]]의 패전 책임이 [[김천일]]한테 있단 식으로 적혀 있는데, 이것에 대해선 '''김천일이 [[서인]]이었기 때문이었단 게 통설이다.''' [[안방준]]도 저 편파적 서술에 대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실제로 징비록에는 서인 소속인 [[이일]], [[신립]], [[윤두수]] 등도 지나치게 나쁘게 서술되어 있다. 물론 저들도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전체적인 관련 기록들을 대조해 볼 때 징비록에서 유난히 나쁘게 기록된 게 사실이다. 그에 반해 징비록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마냥 활약하는 건 '''[[류성룡]] 본인''', [[김성일(조선)|김성일]] 같은 '''[[남인]]이다.''' --내 편은 멋지게, 니 편은 나쁘게-- [[윤근수]] 등은 징비록에 대해 '잘된건 죄다 자기 공으로 돌려서 이거 공평하지 못하잖아'라는 식으로 투덜대기도 했는데, '''실제로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징비록에 적힌 내용을 종합해 보면 '''임진왜란은 (사실상) 서인 때문에 난 전쟁이고, 그걸 해결한 게 남인--특히 나--이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일본이 쳐들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헛다리를 짚었던 게 다름아닌 김성일과 류성룡 본인들인 걸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 이 탓에 징비록을 폄하하는 사람 중에선 징비록을 그냥 --서애어천가-- 류성룡의 [[자서전]] 정도로 일축하는 사람도 있다. --정작 지 친구의 [[난중일기|진짜 일기]]는 실록보다도 객관적인 게 개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