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쩐반짜 (문단 편집) === 통일후: [[토사구팽]] === 하지만 1960년대부터 북베트남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던 그는 통일후에도 남베트남 출신 [[베트콩]] 참전용사들이 대한 대접이 미흡하다며 계속 항의를 했고, 1982년 독자적으로 베트콩의 활약상을 회고한 회고록 <30년 전쟁의 종말(Kết thúc cuộc chiến tranh 30 năm)>을 출판했다. 이 회고록에서 그는 남베트남과 미국을 패퇴시킨 것은 북베트남군이 아니라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불굴의 애국적 열정으로 미군을 물고 늘어진 베트콩 전사의 역할이 가장 컸으며,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베트남 공산당을 비판했다. 여기에 구정 공세에서 북베트남이 제때 지원하지 않아 남베트남 출신이 주축이 된 베트콩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비난했다. 이는 정권을 잡고 있떤 북베트남 출신 정치가들의 어그로를 끌었고, 바로 정권에서 쫓겨난데다가, 회고록은 회수되어 모조리 소각되었다. 그렇지만 워낙 전설적인 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숙청되어 수용소에 간게 아니라 그저 실권에서 배제되고 상징적인 지위만을 맡았다. 그리하여 얼마간 호치민시의 고급 주택가에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고 한다. 이 양반은 비교적 안전한 하노이에서 군을 지휘하던 국방장관겸 베트남 인민군 총사령 [[보응우옌잡]] 대장이나 [[총참모장]] [[반띠엔중]] 대장과는 달리 남베트남 현지에 파견되어 미군이나 남베트남군 사이에서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직접 싸워왔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승리에 있어서는 특등공신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당의 방침과 어긋나는 회고록을 써서 당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는 죄목으로 상장과 국방부 차장에서 승진을 그치고 한동안 감시를 받으며 상징적인 지위만을 맡았다. 베트남 전쟁 종전시에는 군서열 3-4위였으나, 그와 서열이 비슷했던 [[쭈후이먼]]이 1980년대 대장까지 승진했고, 그보다 서열이 낮았던 레둑안도 대장에 오른 것뿐만 아니라 1992년 정무직으로 최고지위인 주석(대통령으로도 번역됨) 까지 올랐지만, 쩐반짜는 상장에 머무른데다가 회고록 출판 이후에는 죽을때까지 야인으로 지냈으니 씁쓸한 [[토사구팽]]이 아닐 수 없다. [[파일:external/img.v3.news.zdn.vn/1912_Anh_1_Thuong_tuong_Tran_Van_Tra_1.jpg]] 만년의 쩐반짜(왼쪽). 옆은 베트남 인민군 총사령이었던 [[보응우옌잡]] 대장. 서방소스의 자료에는 죽을때까지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고 기록되어 있고, 일부 반공 자료들이 이를 과장해서 베트남 전쟁후 베트콩 세력이 숙청되었다는 잘못된 사실이 한국 밀덕계에 알려져 있으나, 만년에는 복권된 모양이다. 위의 정복차림의 프로필 사진도 승전기념행사에 촬영된 것이며, 바로 위의 사진과 같이 과거 상관이었던 보응우옌잡과 사복차림으로 만난 사진도 있다. 금서가 되었던 회고록 30년전쟁의 종말은 2005년 해금되어 현재 베트남에선 쉽게 구해볼 수 있다. [[파일:external/www.thuvienbinhduong.org.vn/30-4-06.jp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