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경석 (문단 편집) == 경세제민과 문화운동 ==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 동학농민군 대장의 슬로건은 보국안민이었다. 차경석의 슬로건은 경세제민이었다. 세상을 경제로서 일으켜 백성을 모두 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차경석은 보천교를 통해 출판사업, 민립대학 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다. 직접 기업을 경영하거나 민족의 교육에 힘써 실력양성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1923년 1월에는 시대일보사에 출자를 승낙하였다. 1923년에 보광사라는 출판사와 인쇄소를 설립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활자 인쇄물인 《보광(普光)》잡지를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종교·문화와 예술 부문을 다루었다. 1923년 12월에 조선물산장려회 초기 기관지 『산업계(産業界)』를 보광사에서 발간하였는데,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하는 한편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벌여나갔다. 보천교 교단에서는 자작회(自作會) 만들어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참가하였다.[* 김철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실력양성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65쪽][* 『보광』 창간호, 1923. 10월 23일. 60쪽.] 1924년에는 [[최남선]]이 운영했던 일간지 '시대일보사'를 인수하였다. 이것은 보천교를 맹렬히 비판하고 친일행각을 벌인 《동아일보》와 맞서기 위한 대책이기도 하였다.[* 김재영, 《동학 이후 증산계열의 민족운동》(김재영 저, 학술대회, 2016) 40쪽.] 1924년 9월에는 본소의 노동자 편의를 주기 위하여 기산조합 자치단체를 결성했다. 기산조합은 자급자족의 경제공동체로 교인들의 단체 노동을 통해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조합에서는 직업 소개, 물품 매매 소개, 조합원의 상호 재난 구호 사업을 벌여나갓다. 각 교도는 푸른 옷을 입고, 직물공장, 염색공장, 농기구공장, 유리공장, 옥공장 등에서 수공업에 참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