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드 (문단 편집) === 현대사 === [[2차 대전]] 당시에는 당시 총독이었던 [[펠릭스 에부에]]의 영향으로 프랑스의 식민지 중 제일 먼저 [[자유 프랑스]]를 지지했다. 그로 인해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주둔하던 [[이탈리아 왕국군]]과 충돌하기도 했으나 큰 교전은 없었다. 물론 이것이 향후 리비아와의 악연의 시작이기도 하다. [[파일:François Tombalbaye.jpg|width=400]] [[프랑수아 톰발바예]]. 이후 투쟁을 통해 차드는 [[1960년]] 8월 11일 아프리카의 해(The Year of Africa)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했고, 초대 대통령 프랑수아 톰발바예(François Tombalbaye)는 일당 독재 국가를 구축했다. 남부 출신인 프랑수아 톰발바예 대통령이 집권하자 소수의 남부 기독교인([[천주교]] 및 [[개신교]])들이 다수의 북부 아랍계 흑인 무슬림을 탄압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이웃 [[수단 공화국|수단]]과는 정반대의 양상이었다. 그러나 정권을 놓고 남부의 기독교인 주민과 무슬림인 북부의 흑인 [[아랍인]] 및 [[투아레그]] 등의 무슬림 주민 간의 대립이 이어졌고 결국 이러한 대립은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다. 차드 북부의 아랍계 무슬림 사이에서 남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고, [[1966년]] 차드 북부의 반정부 단체인 '차드 민족해방전선(FROLINAT)'이 세워짐으로서 그 악명 높은 차드 내전이 시작되었다. 목표는 FROLINAT를 구성하는 아랍계 북부민들이 남부 기독교계 정권을 엎어버리고 기독교계 주민들을 전원 인근 국가들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이 내전을 부추기기 위해서 FROLINAT에 군사지원을 하자, 열세에 몰린 중앙정부는 [[프랑스]]에 파병을 요청해게 됐고 이후 차드 내전은 리비아와 프랑스가 개입한 국제전으로 발전했다. 사실상 [[2017년]] 이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차드 내전은 [[1960년]] 8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민족해방이라는 공동목표 아래 뭉쳤던 여러 부족 지도자들이 패권쟁탈을 위하여 갈라진 것이 그 원인이다. 이후에는 서로의 이익만을 위한 내전과 쿠데타로 분쟁이 장기화돼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이렇게 내전이 계속되는 동안에 [[1975년]]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톰발바예 정부는 무너지고 톰발바예 또한 축출되어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 톰발바예는 총을 너무 많이 맞아서 시신이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이후에 남부 출신 [[가톨릭]]교도 펠릭스 말룸(Félix Malloum)에 의한 군사정권이 세워졌으나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나고 대통령 암살 사건이 있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남부인들은 이후 완전히 실각하게 됐고 북부 아랍계 무슬림들이 실권을 잡게 되어 다민족 다종교의 다문화 국가였던 차드는 순식간에 아랍권 국가로 변모한다. 결국 [[1979년]] 인접 5개국이 중재에 나선 끝에, 남북은 휴전 협정을 체결해 아랍계 북부가 주도하는 '과도거국일치내각(GUNT)'을 수립했다. 그러자 [[1979년]] 혼란의 끝에 군사정권 지도자였던 펠릭스 말룸(Félix Malloum)이 망명하고 선거가 치뤄졌다. 이에 따라 [[1979년]] 8월 FROLINAT의 아랍계 흑인인 [[구쿠니 웨데이]](Goukouni Oueddei)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FROLINAT 내부에 대립이 발생해 '인민군(FAP)'과 '북부군(FAN)'으로 나뉘어 파벌 투쟁을 벌였다. 남부 기독교인들에 맞서 힘을 합친 아랍계가 이제는 파벌을 나누어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투아레그인]]들까지 [[리비아]]의 지원을 받고 북부 티베스티 일대에서 게릴라 활동을 시작해, 차드 내전은 인민군 대 북부군이라는 아랍계 양대 파벌과 북부 접경지대 투아레그인 반군이라는 삼파전으로 치닫는다. [[파일:external/www.leral.net/8269167-12935487.jpg|width=300]] [[이센 아브레]]. 북부 투부족(아랍화된 나일사하라어족 유목민족) 출신의 무슬림이다. 이런 상황 속에 결국 [[1980년]] 3월 FROLINAT 안에서 웨데이와 [[이센 아브레]](Hissène Habré) 사이의 내분이 일어나 다시 내전이 재발했다. [[1980년]] 웨데이를 지원하던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는 군대를 보내고 [[1981년]] 차드의 합병을 선언했다가 아프리카 단결 기구([[아프리카 연합]]의 전신)의 비난으로 철수했고 [[1982년]] 결국 내전에서 승리한 아브레가 다시 차드 수도 [[은자메나]]를 점거하고 대통령이 된다. 그렇게 [[1982년]] FAN은 GUNT를 타도하고 6인 임시위원의 국가위원회가 이끄는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과거 GUNT를 구성했던 파벌들은 대부분 자체 군대를 유지하고 있어 정부 지배력은 일부 지방에 국한되었다. 이 와중에 [[리비아]]의 카다피가 또다시 FAP를 지원하고 미국이 중앙정부를 지원하면서 차드 내전은 또 다시 국제분쟁으로 발전했다. 게다가 [[1983년]] [[리비아]]가 침공해 [[토요타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은 국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리비아가 약소국 차드에게 패하며 망신을 당한다. 그리고 리비아는 이후 [[이집트]]와의 국지전에서도 패배해 국방비는 펑펑 쓰는데도 전쟁은 더럽게 못 하는 나라라는 오명을 얻는다. 참고로 도요타 전쟁에서도 이집트가 차드를 지원했는데 이집트는 이미 사다트 이후 리비아와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로 변모해 대리전을 치른 것이다. [[1984년]]에 이르면 웨데이파도 분열되어 내전이 더 심해졌다. 그러나 리비아가 아무리 지원을 해봐야 미국의 지원을 이기기는 무리였고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는 [[1986년]] 차드 정부군은 [[미국]]의 지원으로 리비아군 주둔지와 웨데이파 거점을 점령했다. 그렇게 [[1986년]] 리비아가 지원하던 우마르파가 패망한 [[1987년]] 차드 정부군은 차드 전체를 통일한 것 같았고 [[1980년대]] 말까지 이센 아브레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그의 세력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아브레는 확인되는 사람만 약 4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살해하는 폭압적인 독재정치를 행했고 이에 차드 내의 여론도 점점 아브레에게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EP20121206014201034_P2.jpg]] [[이드리스 데비 이트노]] 대통령. 이렇게 아브레에 대한 비난이 높아져가자 [[1990년]] 아브레의 군사고문이었던 [[이드리스 데비 이트노]]가 리비아의 지원으로 다시 애국구원운동당을 만들어 [[게릴라]]전을 통해 다시 수도를 점령하고 권력을 잡았다. 이드리스 데비는 [[1993년]] 잠정의회인 고등잠정평의회를 발족시켜 1993년 최고국민회의를 개최하고 신헌법 채택 등 민주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후 [[1994년]] 민정이관을 결정하였고, 1996년 신헌법에 의해 이드리스 데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98년]] 5월 남부 반군이었던 '연방공화국군(FARF)'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FARF를 합법 정당화하여 남부 지역의 내전을 종결시켰다. 그렇게 [[1998년]] 남부 반군과의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 내전이 끝나는 듯 했으나 [[1999년]] 다시 반군이 새롭게 일어났다. [[1999년]] 11월 유수프 토고이미(Youssouf Togoïmi)가 이끄는 '차드 민주주의·정의 운동(MDJT)' 반군이 새롭게 일어나 북부 티베스티 지역을 공격하고 [[2000년]] 3월과 7월에 대규모 교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남부 지역에서도 소규모 반군 활동을 벌여 차드는 막장 상황에 빠졌다. 북부의 토고이미가 이끄는 반군은 [[투부족]]들이 대거 합세해 북부 지역이 개판이 된 것도 모자라 [[1970년대]] 이후 내전 패배로 실각한 남부 기독교도들 역시 설욕과 복수를 벼르고 있었기에 차드는 남부 기독교계 반군과 북부 투부족들의 분쟁으로 나라 전체가 [[소말리아]]나 [[리비아]] 못지 않은 불바다가 된다. 이후 부정선거를 통해 2001년 5월 이드리스 데비가 총선거에서 재선되어 2001년 9월 반군과 협상을 제의했으나 반군은 거절했다. 내전은 현재진행형인데 이드리스 데비의 장기집권에 대한 차드 국민들의 염증이 내전발발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차드 반군을 이끄는 지도자 중에는 마하마트 누리(Mahamat Nouri) 전 국방장관 등 데비 대통령 휘하에서 일했던 고위 관료들이 많다. 이들은 데비 대통령의 장기 독재와 부정부패에 불만을 품고 반군에 합류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ivil_war_in_Chad.png|width=100%]] || || 차드 내전이 일어나는 주요 교전지 || 지난 2003년 이후 수단에서 [[오마르 알바시르]]가 [[다르푸르 학살]]을 자행하여 수단의 [[푸르족]] 난민이 차드로 흘러들면서 국경에서의 분쟁이 빈발하자 수단 정부는 차드의 반군을 지원하고, 차드 정부는 이에 맞서 수단의 반군을 지원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2008년]]에는 반군 공세가 강화되면서 은자메나가 장악되어 대통령이 대통령궁에 고립되기도 하였으며, 정부군과 반군이 대통령궁 주변에서 산발적으로 교전을 벌이고 있다고 현지 군과 반군 소식통들이 전했다. 수천여명의 반군들로 구성된 연합세력은 지난 1일부터 중화기를 동원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 시내 곳곳에서는 치열한 교전이 일어나 사망자와 부상자가 대거 발생했으며, 일부 약탈도 자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번 교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아직 정확하게 집계되지 않고 있으나 유엔관료들은 거리에 수많은 시신들이 널려 있다고 전했으며, 사우디 외무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저에 포탄 한 발이 떨어지면서 대사관 직원의 부인과 딸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반군은 쫓겨났지만 [[2009년]]에도 동부 지역에서 교전이 계속되었다. 이들 반군은 상당수가 [[수단 공화국]]에서 지원하거나 수단에 근거지를 둔 이유로 차드가 수단 몇몇 지역의 반군 거점을 폭격하는 등의 행동을 해 수단과의 외교 마찰도 자주 일어났다. 이런 막장 상황에서 차드 반군과 정부군이 [[소년병]]을 모집하고 있다. 현재 차드는 휴전 협정을 맺고 내전이 일시적으로 멈춘 상태이지만, 내전의 후유증은 더 없이 심각한 상태다.이드리스 데비 대통령의 통제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지만 국제 전문가들은 지속적인 반군들의 활동과 차드의 만성적인 가난으로 인해 데비 대통령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도 많다. 그나마 [[2010년대]] 전반에는 전후 복구 효과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지만 이것도 [[2010년대]] 후반기 들어서 마이너스로 돌아서면서 다시금 암물한 상황에 빠졌다. [[2015년]]에는 [[보코 하람]]과 싸우기 위해서 [[나이지리아]]에 파병을 보냈다. [[내전]]으로 쌓은 경험치 때문인지 보코 하람을 압도적인 사상비로 격파하는 미친 전투력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이 [[2015년]] 즈음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내전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잠깐의 안정기라고 볼 수 있었다. 거기에 북부 [[나이지리아]] 파병으로 인한 타 국가들의 지원이 어느정도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미래가 평화로운 쪽으로 달라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희망에 불과했고 [[2010년대]]가 끝나가는 시점에 차드에서 다시 말썽이 벌어진다. [[2019년]] 8월 19일에 차드 동부에서 아랍계 혹은 투부족 유목민과 토착 농민 사이에서 유혈사태가 발생되자 차드 정부는 동부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001&aid=0011027211|관련 기사]]. 아랍계 집권층끼리도 서로 욕심을 부리며 이것저것 해먹으려 하며 여기에 비아랍계 무슬림 유목민들이 저항하고, 밀려난 남부 기독교계 세력도 설욕을 꿈꾸는지라 차드는 남북이 완벽히 포위되어 버렸으며 어쩌면 소말리아만도 못한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애초 프랑스가 처음에 이질적인 두 지역을 묶어버린 원죄가 크다. 이륙중이던 전투기에서 미사일이 오작동 발사되며 5명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421&aid=0004597946|관련 기사]]. 한편 2021년 4월부터 북부에서 일어난 전쟁 덕택에 이드리스 데비가 2021년 대선에서 6선 연임에 성공했지만, 바로 다음날 반군과 싸우던 군부대를 시찰하다가 반군의 공격으로 부상당해 사망했다. 데비 전 대통령이 사망한 뒤, 4월 21일에 폐쇄되었던 국경이 재개방됐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001&aid=0012345572|관련 기사]]. 2022년 1월 28일에 차드에서 종족 갈등이 일어나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해 최소 14명이 사망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001&aid=0012949249|#]] 2023년 1월 28일, 차드에서 트럭과 버스 충돌 사고가 일어나 20명 이상이 사망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3723502?sid=10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