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오관화 (문단 편집) === 문혁시기 === 1961년 제네바 회의에 중국 대표단원으로 출석하여 라오스의 중립 문제를 논했고 1964년 지펑페이, 왕빙난, 천자캉 등과 함께 외교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이후 홍위병들이 주도한 외교부 탈권 현상에 휘말려 1967년 지펑페이 등과 함께 감금당하는 등 박해를 받았으나[* 이때 다른 부부장들도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등 비판을 면치 못했고 홍위병들은 급기야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마오쩌둥]]이 왕리, 관펑 등 중앙문혁소조의 급진파들을 숙청한 후 다시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지시로 1971년 11월 15일 유엔 총회에 중국 수석대표로 출석,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권을 인정받았다. 차오관화는 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의 우호국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중국정부의 원칙과 입장에 대해 설명하며 결의안 통과가 중국 외교사업에서의 한차례 중대한 돌파이며 평화를 사랑하고 정의를 주장하는 모든 국가들의 공동 노력의 결과라고 밝혔다. || [[파일:vdTM9us.jpg|width=100%]] || || 1971년 10월,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2758호 결의안]]이 통과되는 순간의 차오관화. 오른쪽 인물은 후임 외교부장이 되는 [[황화(1913)|황화]]다. || 1972년 [[닉슨-마오쩌둥 회담]] 이후 [[헨리 키신저]]와 함께 공동성명의 초안을 작성했다. 1973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의 관계가 악화되자 11월 21일 인민대회당에서 소집된 회의에 지펑페이, 중시둥, 황전 등과 함께 외교부 대표초 참석하여 저우언라이를 규탄해야 했다. 하지만 차오관화는 문혁이 종식된 후 자신은 저우언라이가 잘못한 것을 믿지 않았으며 회의에서 저우언라이를 규탄해야 했던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1974년에 외교부장에 임명되었고 1974년 3월 유엔 6차 특별회의 대표단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수행원이 [[덩샤오핑]]이었는데 실질적인 대표단장은 당연히 덩샤오핑이었다. 차오관화는 1주일만에 덩샤오핑의 유엔연설문을 준비했다. 마오쩌둥은 차오관화의 원고에 대해 동의를 표했고 덩샤오핑은 2세계와 3세계가 연합하여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에 대항해야 한다고 연설하여 큰 갈채를 받았다. 차오관화는 1974년 10월 "UN이 더 이상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되며 모든 주한 외국군이 철수해야 한다.", "한반도 문제의 책임은 [[대한민국|남조선]]의 탓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한중수교 전까지 중국의 공식입장이었다. 하지만 북한이 남침을 하면 즉각적인 중공군 개입은 없을 거라고 한발 빼긴 했다. 1976년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미국 연락사무소 소장 [[조지 H. W. 부시]]와 함께 일정을 정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