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오쿤 (문단 편집) === [[2차 직봉전쟁]] === 차오쿤이 대총통이 된 이후, 우페이푸는 직노예순열사에 임명되었고 조예는 직노예순열부사가 되었다. 하지만 군비 문제와 논공행상으로 인하여 휘하의 [[펑위샹]] 등은 우페이푸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하남독군이었던 펑위샹은 베이징의 육군검열사로 좌천되어 쫓겨나게 되었고 군비 지급도 받지 못했다. 북방에서 군 현대화와 정예 장교진을 육성하며 권토중래를 도모하던 장쭤린은 펑위샹을 회유했다. 1924년 9월 3일, 상하이를 다스리던 환계의 절강독군 [[루융샹]]이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중앙과 왕래를 중단하자 차오쿤은 [[치셰위안]], [[쑨촨팡]] 등을 동원하여 루융샹을 토벌하게 함으로 [[강절전쟁]]을 일어났다. 이에 [[쉬수정]] 등 [[안휘군벌]]들이 흥기를 위해 가담했다. 이에 쑨원이 남방에서 호응했고 장쭤린이 차오쿤과 우페이푸 토벌을 선포하면서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났다. 북방 전선에서 우페이푸가 직접 독전했지만 [[궈쑹링]], [[장덩쉬안]] 등 봉천군벌의 명장들이 현대화된 부대를 바탕으로 직예군을 잇달아 격파했다. 여기에 펑위샹이 2로군 1사단장 호경익, 연합경기경비수사령관 손악과 연합하여 10월 23일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장악하고 총통부를 포위했다. 차오쿤은 펑위샹의 위협에 우페이푸의 모든 공직을 물러나게 하고 청해성 독판으로 멀리 보내게 했다. 이어 [[옌후이칭]] 내각을 사퇴하게 하고 황부를 국무총리 겸 교통총장에 임명하였다. 펑위샹은 차오쿤의 대총통 직위를 유지시킨 다음에 쑨원, 돤치루이 등을 초청하여 과두정을 수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장쭤린, 돤치루이 등은 강경하게 직계군벌과 차오쿤에 대한 대응을 요구하고 있었고 우페이푸가 차오쿤의 명의로 발표된 정전령을 무시하고 톈진을 공격하면서 펑위샹은 차오쿤을 하야시키기로 결정했다. 11월 2일 차오쿤은 대총통에서 사직했고 펑위샹은 국무총리 황부로 하여금 총통직을 대행하게 했다. 이후 차오쿤은 중난하이에 연금되었다.[* 차오쿤이 미국에 접근하려는 것을 경계한 일본의 사주라는 음모론이 있다.] 펑위샹과 장쭤린은 돤치루이를 초빙하여 임시집정 정부를 수립하였고 이것으로 천하는 장쭤린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쭤린과 펑위샹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직계의 쑨촨팡이 오성연군을 조직하여 1925년 [[손봉전쟁]]을 일으켰다. 이어 대고 사건, 3.18 참안 등이 발생하면서 궁지에 몰린 돤치루이는 하야했고 펑위샹 휘하의 녹종린은 직계와 연합하기 위해 차오쿤을 석방하고 직계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으나 우페이푸는 거절했고 오히려 옌시산, 장쭤린과 연합하여 1926년 [[직봉풍전쟁]]에서 펑위샹을 격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