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경궁 (문단 편집) == 역사 == [[태종(조선)|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을 때에 창덕궁 옆인 이곳에 별궁을 지어 거처로 삼았고, 이름을 수강궁(壽康宮)이라 했다. 이것이 창경궁의 시작이었다. 이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 후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쫓겨났다. [[성종(조선)|성종 15년]](1484)에 할머니 [[정희왕후|자성대왕대비]] 윤씨, 어머니 [[소혜왕후|인수왕대비]] 한씨, 숙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인혜왕대비]] 한씨를 모시기 위해 궁의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고 궁을 크게 증축 확장했다. 성종 때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녕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다. [[광해군|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해 이듬해 11월 마무리됐다.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으나,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됐다. 창경궁은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있었다. 이후 조선 왕조가 기울고 [[순종(조선)]] 즉위 후 급속히 변형돼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됐다. 1909년 일제가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전각들을 헐고, 일본식 건물을 세워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드는 등 유원지로 조성했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꿨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시켰으며,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끊어 도로계획까지 했으나(현 [[율곡로(서울)|율곡로]]),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해 건설이 미뤄져 순종 사망 후인 1932년에 도로가 났다. 해당 도로는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 [[2009년]] 종묘 복원 계획을 세우고 [[박원순]] 시장이 이어받아 [[2022년]] 완공을 봤다. 이것이 바로 [[율곡터널]]이다.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결정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했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시켜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했다. 1992년에는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이 철거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