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채명신 (문단 편집) == 기타 == * KBS 다큐멘터리 "우리 시대의 군인, 채명신"이 있다. [youtube(dDbSJ80lK7c)] * [[장준하]]를 대단히 존경했다고 한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분이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에 출마한다면 맨발로 뛰어다니며 운동하고 싶은 심정”[[http://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49678.html|이라고까지]] 표현했을 정도. 월남전 파병 장병들 처우 개선에 대해 다른 국회의원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을 때 유일하게 장준하(당시 국방위원회 소속)가 앞장서서 처우개선을 위해 관심가지고 처우개선 법안 내용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후로 채 장군은 장준하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표했다고. * 그가 대장 진급을 하고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부 장관]]이 되었다면 현대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채명신을 누르고 대장(이후 육군참모총장) → 국방장관이 된 사람이 [[노재현]]. [[12.12 군사반란]] 때 도망쳤던 바로 그 장관이기 때문이다. * 혼외자식 문제(친자확인 소송이 있었다.)나, [[학생군사교육단|ROTC]]들을 업고 큰일(대권)을 꾀한다는 음해로 고생했으며, 예편의 진짜 이유가 위에 언급된 유신 반대 때문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축재를 너무 많이 해, 부하들이 연판장을 돌려 예편하게 됐다는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의 증언까지 나온 적도 있다. 하지만 반대측에선 그를 음해하는 주장일 뿐이라며, 채명신에 대한 다각적인 평은 '''오히려 강력한 권력하에서 "암투가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됐는지"''' 알 수 있는 한 단면이라고 말하는 주장도 있다. * 일본의 밀리터리 작가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Cat Shit One]]에 채명신의 뉴스위크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 회고록에서 국군의 계급장 색깔이 하얀색이었으나 미군에서 제기된 저격 위험성으로 검은색으로 하자 이에 미군을 따라해 검은색으로 바뀐 것에 대해[* 정확히는 백색 → 노란색 → 검은색. 육군 기준.] 검은색은 [[초상]]의 의미라고 하며 아쉬워 하였다. 채명신 본인의 경험상으로는 백색 계급장이 위험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자신의 경험상 계급장을 보고 계급을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나 가능한 것인데 오히려 이것보다는 장성만이 착용하는 상징인 가죽 혁대나 권총집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맞는 말인것이 미군이긴 하지만 베트남전 당시 미국 저격수들은 단독으로 적진으로 들어가 지휘관을 저격하고 나오는 임무를 맡는 경우가 있었는데. 사병과 지휘관을 구별하는 요령은 명령을 내리느라 이리저리 손짓을 많이 하는 인물이 지휘관이라고 판단을 하지 멀리서 계급장 식별하려고 용 쓰지 않았다. 허나 근거리 교전을 해야했던 강릉 무장공비 사건때 구형 계급장이 너무 잘 보이는 것이 문제가 되어 저시인성인 검정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베트남전 첫 브리핑 때 미군 장성들이 백색 계급장을 검은색으로 바꾸는게 좋겠다는 제안도 거절하였다고 한다. 당장 한국전쟁 때도 장교들은 반창고를 오려서라도 지휘의 상징인 계급을 철모에 부착했다고 술회하나 대세는 어쩔 수 없었고... 회고록에서 그렇게 백색 계급장이 문제될 거라고 생각하면 땅에 침을 뱉어서 그걸로 백색 계급장에 문지르면 3초 안에 해결될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것으로 그친다. * 현재까지 민간에 잘 알려진 유명 한국군 장성 중에서 [[장태완]]과 더불어 가장 '''장병 복지'''에 신경 쓴 장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장태완은 당시 중령 계급으로 맹호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병사들을 자식처럼 생각하며 배려한 일화도 상당히 많은데, 그 대표적인 일화로, [[베트남 전쟁]] 당시 그는 보병의 전투력은 '''발바닥'''에서 나온다는 철학을 가지고 [[베트남]] 기후 특성상 무덥고 매우 습하기 때문에 여름철이 되면 전 병력에게 아예 군화 벗고 맨발로 다니게 하라는 지시도 했다고 한다. 시찰 도중, 병사들의 발바닥과 발가락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무좀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후 3분의 2가 넘는 병사가 무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병력들을 휴양소에 들어가게 하여 해변가 백사장을 맨발로 걷게하며 무좀을 치료케 하기도 했다. - 심지어는 매일 저녁 취침하기 전, 병사들의 발을 반드시 씻게 하여 발에 냄새가 나지 않도록 지시했는데 병사의 발냄새가 심하면 아예 그 부대 중대장의 종아리를 매로 쳤다고 할 정도였다. 무좀 방지와, 그 발냄새에 꼬인 모기들을 막아 혹시 모를 [[말라리아]] 확산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그의 생각이었다고. 결국 참전 부대가 '''발병부대'''가 되지 않도록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 전투력을 올리게끔 한 그의 [[https://books.google.co.kr/books?id=31KyBQAAQBAJ&pg=PT218&lpg=PT218&dq=%EC%B1%84%EB%AA%85%EC%8B%A0+%ED%96%A5%EA%B8%B0%EB%A1%9C%EC%9A%B4+%EC%82%B6%EC%9D%98+%EC%A7%80%ED%98%9C&source=bl&ots=K_GX6DuHYv&sig=cBZSsMmvyXbpcxxWd1ltuQikD88&hl=ko&sa=X&ei=O0qhVe7kAqTQmwWPwbfoCw&ved=0CB4Q6AEwAA#v=onepage&q=%EC%B1%84%EB%AA%85%EC%8B%A0%20%ED%96%A5%EA%B8%B0%EB%A1%9C%EC%9A%B4%20%EC%82%B6%EC%9D%98%20%EC%A7%80%ED%98%9C&f=false|특유의]] [[http://www.vietnamwar.co.kr/technote6/board.php?board=gesipan1&page=164&sort=wdate&command=body&no=18838|지휘철학이었던 셈]]. [[http://www.mpva.go.kr/open/open130_view.asp?ID=76216|그의 일화들]]. * 파병 결정 후 [[여의도]]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바로 출발할 예정이었던 장병들의 면회를 허용해달라고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와 [[대한민국 육군본부]]에 강력히 요청해 허가를 얻었다. 상부에선 면회를 허용하면 장병들의 사기에 악영향이 올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채명신은 오히려 면회를 허용해주면 가족들의 축복 속에 전선으로 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채명신의 강력한 요구에 결국 육군본부의 허가를 얻었고 채명신은 여기에 더해 당시 완전히 허허벌판이던 여의도에 [[공병]]대를 동원해 간단한 간이 면회 장소를 만들었다.[* 국군 고위 지휘관들의 한국전쟁 회고록에 자주 등장하는 '씨받이 면회'가 이때도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사실 허가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채명신은 이를 알고 있었지만 막거나 하지 않았고 오히려 합판으로 부부가 둘만의 관계를 가질 공간을 만들어주기까지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 최고위 지휘관이었던 백선엽도 이를 알고 있었고 원래는 하면 안되는 것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전혀 막거나 하지 않았다.] 당연히 장병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면회에 감격했다. * 위의 중대전술기지와 M16 소총 요구, K 레이션 요구 등은 모두 채명신이 장병들을 각별히 여겼기 때문에 한 행동들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지휘관들은 이런 것을 아예 신경쓰지 않았다. 당장 파월 직전에 국방부와 미군의 협의가 있었을 때 어떤 장성이 "한국군이 미군의 지휘를 받는것은 영광이다"라고까지 한 적이 있다. 만약 채명신이 지휘관이 아니었다면 파월 한국군은 미군과 그대로, 똑같은 작전으로 나갔을 것이고 미군의 문제점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 국군이 미군에 대해 떠받들다시피 하는 풍습을 바꾼 바 있다. 당시엔 아직 미군 고문관이 있었을 때였는데 지프를 타면 원래는 상급자가 조수석에 [[선임탑승자|선탑]]하고 하급자가 뒷칸에 후탑하여야 하나 국군 장성이 미군 고문관과 타면 대령인 미군 고문관은 조수석에, 중장인 국군 [[제1야전군사령관]]은 뒷좌석에 앉았다. 채명신은 이에 대해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견지하였고 자신이 지휘관으로 있었던 베트남전에선 이같은 풍습을 근절시켰다. 채명신 자신이 이렇게 하니 한국에서도 이러한 풍습이 서서히 없어졌다고.[* 다만 채명신도 이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장 광복 이후 아무것도 없던 국군을 지원해준 것도 미군이었고 한국전쟁으로 박살날 처지의 한국과 국군을 구해준 것도 미군이었고 전후에도 이런저런 지원을 해준 것 또한 미군이었으니 자신의 선배들이 이렇게 행동했던 것도 이해한다고 회고록에 기술해 놓았다.] * 파병 극초기에 처음으로 마련된 한-미-월남 합동 작전회의 때 기묘한 경험을 한 바 있다. 3개국 장성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별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 회의는 금방 끝났고, 월남 장성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가버렸다. 어리둥절해 하는 채명신을 미군 장성이 다른 방으로 안내해 뜻밖의 얘기를 했다.[* 실제로 월남군 장성 및 고위장교들은 막장이였고 대민지원에 쓰라며 건네준 지원 물품을 자기네들 것이라며 독차지하는 등 군벌에 가까운 행동을 자처했고 베트콩 처치하라고 지원한 무기는 되려 베트콩에게 팔아서 넘기는 등 막장에 가까웠다. 게다가 유능한 장교들은 전부 숙청당한 상태였다.] 그 미군 장군은 "그들(월남군)에게 하는 얘기는 곧바로 베트콩으로 들어가며 이 때문에 미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했고, 채명신이 안내된 다른 방에서 진짜 작전회의가 열렸다. 채명신 자신은 이 때 '우리가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복잡했다고. * 다른 한편으로는 자서전에서 한국군은 포로가 없다고 서술되었던 점에서 안학수 하사 납북이 2009년에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며 나왔는데, 연장선상에서 위의 행동들에 대한 진정성이 의문시된다는 사람도 있다. * 전장에서 자꾸 아군 오사 사례가 나타나자, 파월 병력들을 집합시켜 "지금부터 일체 움직임이나 소리를 내지 말도록 하라. 위반할 경우 [[즉결 처분]]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적 있다. 당초에는 교육효과를 노린 엄포 차원에 불과했지만, 문제는 하필 그 순간에 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인 사람이 나타나버렸다고 한다.[* 사전에 경고한 내용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처벌(사살)하였다고 한다.] 2000년대 이전에 출간된 회고록에는 이날 싸움 한 번 못 해보고 죽은 그 장병분에 대한 죄책감이 술회되어 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