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채명신 (문단 편집) === 백골병단 관련 === 백골병단의 활약에 대해서는 참전 부대원들의 단체인 대한유격대 참전동지회에서 발간한 《백골병단 전사》, 육본 직할 결사대 전우회에서 발간한 《육군본부 직할 결사대 (백골병단) 60년사》 등의 다양한 서적에서 다루고 있다. 관련자들의 증언을 모아 정리한 것이라 자료들마다 조금씩 상충되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 자료에서는 공통적으로 백골병단 최대의 전과 중의 하나로 1951년 3월 [[설악산]] [[한계령]] 부근에서 북한 제5유격지대장 길원팔 중장을 생포한 사건을 꼽고 있다. 길원팔은 당시 북한군 제5유격지대장을 맡고 있었다. 이들은 [[인천 상륙작전]] 이후 전개된 북진 과정에서 낙오된 패잔병들로 편성되어 한때 병력이 1만여 명에 이르렀으나, 1950년 12월~1951년 1월에 걸쳐 한국군 제3군단의 공격을 받아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채명신과 제13연대 유격대원들은 식량 확보를 위해 수색정찰을 하던 도중에 이 제5유격지대 지휘부가 기거하던 민가를 발견하여 지대장 길원팔 중장, 참모장 강칠성 총좌와 수행원들을 생포했다. 이때 수행비서를 맡고 있던 여군관은 남한의 모 여대에 재학하다 월북한 인사였다고 한다.[* 일부 문헌에서는 [[이화여전]] 출신이라고 적고 있다. 북한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납북당한걸 구출해줬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강제 납치자가 군관이 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이는 잘못된 기술로 보인다.] 이들을 억류하고 있던 도중에 감시가 소홀한 새벽을 틈타 이 남한 출신 여군관이 탈출해버려 북한군 구출부대의 습격을 받을 위험에 노출되었다. 채명신은 먼저 길원팔에게 전향하고 남한으로 같이 가자고 설득했으나, 길원팔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채명신은 약식재판을 열어 이들 포로들에게 극형을 선고하고 처형했다. 다만 길원팔에게는 적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자살을 권유했다. 길원팔도 이를 받아들여 권총 자살을 했다고 한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26/2010052600029.html|#]] 이때 길원팔은 죽기 전에 자신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니던 전쟁고아를 거둬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채명신은 이를 수락하고 함께 아군 진영에 복귀한 뒤에 이 소년을 동생으로 입적시켰다. 이후 친동생인 채명세 소위가 [[피의 능선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이 양동생이 유일한 형제로 남게 되었다. 채명신은 이 양동생을 성심껏 대해주었으며, 양동생 또한 학업에 매진하여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유명 사립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하였다고 한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3277991|#]][* 이 양동생은 [[한양대학교]] [[화학과]]의 채명준 교수이다. 채명준도 지난 2020년 11월에 [[http://new.kcsnet.or.kr/movements/35689|별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