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채명신 (문단 편집) === 월남 장교 === 본래 [[황해도]] [[곡산군]]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로 투옥당한 아버지[* 채명신의 아버지 채은국은 평양에서 [[아나키스트]]로서 활동하다 붙잡힌 독립운동가이다. 후일 채명신은 아버지가 아나키스트가 아니라고 했으며,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지 않았다.]를 대신해 가장 노릇을 했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후 [[평양시|평양]] 인근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평양학원장으로 부임한 [[김책]]이 일대의 교사들을 모아 강연하는 곳에 참석했다가 그가 독립투사 가족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이유[* 볼세비키가 러시아 대혁명으로 소비에트 체제를 수립한 이후 레닌이 반제국주의를 외치면서 민족해방투쟁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자, 당시 강대국들의 식민지였던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 사회주의 사상의 붐이 일어났다. 한반도에서도 마침 일제의 수탈이 본격화 되던 시절이라서, 당시 지식인 계층에선 열광적으로 퍼져나갔으며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 보이', '[[프리드리히 엥겔스|엥겔스]] 걸'이라는 유행어까지 생길 정도.]로 주목되었다. 이후 김책과 가까웠던 [[김일성]]으로부터 평양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에 대면했던 한 [[소련]] 간부가 주둔지로 초청해 자신은 4등급 식사를 한다고 말하며, "만인이 평등하다는건 허구"라 언급한 일을 기억했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이후 회고록에서 첨언하기를 훗날 그가 [[정적]]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언급하며 그 때 받아들이지 않은게 [[전화위복]]이라 했다.] 그 뒤 [[서울특별시|서울]]로 월남했으나 친척이나 지인도 없어 막막하던 중, 아버지와 인연이 있었던 [[이정규]], [[유림(독립운동가)|유림]] 선생을 떠올리고 식객으로 머물며 신학교에 입학하려 했다. 이후 [[세종대학교]]의 전신(前身)인 경성인문중등학원에 입학하여 1944년 졸업하였다.[* [[https://www.donga.com/news/amp/all/20010927/7742181/1|동아일보 - 채명신씨 '자랑스런 세종인상' 받아]]] 경성인문중등학원 졸업 후, 나날이 군비를 증강하는 북한에 비해 남한은 전쟁으로 어지러웠기에 총을 잡기로 결심, [[육군사관학교|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5기로 입학해 전국에 3곳[* [[태릉(문정왕후)|태릉]]의 1연대, 전북의 3연대, [[부산광역시|부산]]의 5연대.] 중 하나인 [[전라북도]] [[익산시|익산]]의 3연대에서 훈련을 받으며 교사 경험을 살려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고 [[제주도]] 9연대로 발령났다. 하지만 당시 육군사관학교에서 머나먼 제주로 간다는 것은 [[유배]]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진터라, 채명신 자신도 성적이 우수한데도 제주에 가게 되어 실망했다고 회고록에 서술하기도 했다. 회고록에서 처음 부임했을 때, 소대장인 채명신 자신을 보는 소대원들의 눈빛은 호기심의 눈빛이 아닌 육지에서 온 앞잡이로 간주하는 증오심의 눈빛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아무튼 [[육군사관학교]] 성적이 우수했던 지휘관 채명신을 회유하고자 [[남조선로동당]]측 사람들이 미인 처녀를[* 순진한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나온다. 무엇보다 이 여학생이 시국을 언급하는 말실수를 한 덕분에 자리를 주선한 사람들의 진의를 파악해 빠져나올 생각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원하기도 했지만, 채명신 본인이 욕념을 억누르고 자리를 떠나 연루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주에서 자신이 겪은 북한의 실상을[* 간단히 말해 '선전과 현실은 다르다'는 요지] 말하며 설득하려 했지만, 육지에서 온 자신을 적대하는 시선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으며, 부대원 일부가 쏜 총탄에 암살당할 위기를 겪는가 하면, 직속 상관인 문영길 2중대장이 연대장을 암살한걸 계기로 9연대 내 동조자들이 모두 [[한라산]]으로 도망가 [[빨치산]]에 가담하는 등 군 안팎의 혼란상을 경험하게 된다. [[제주 4.3사건]]이 본격화되자 채명신 [[소위]]는 강성의 지휘관들이나 [[서북청년단|족청]] 계열 사람들의 학살 움직임에 부화뇌동하지 않았으며 [[정읍발언|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강행]]한[* 당시 몽양 [[여운형]] 같은 정치인 및 일부 지식인들은 먼저 제대로 된 통합 정부부터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여운형의 '선정부 구성론'은 "[[남북분단]]을 막을 수 있었던 혜안"이라는 평과 VS "이상주의"라는 상반된 평이 있다.] [[이승만]] 정권에 부정적이었던 경비대 인사들과 대립하는 와중에도 이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7년 동안 섬 인구 1/10 이상이 죽어간 극한 상황에서 주민들의 협조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걸 깨닫고 가급적 억울한 죽음을 막으려 한 것. 그 뒤 [[수원시|수원]]의 11연대로 발령난 뒤 [[인천광역시|인천]]에서 복무하던 중 월남한 어머니와 재회해 [[만석동]]에 새 터전을 잡았으며, [[개성시|개성]] [[송악산]]에서 4중대장이 되어 [[고지전]]을 치르게 된다. 4중대와 채명신의 육군사관학교 동기 김영직 대위의 하사관 교육대가 각각 좌측 송악산과 우측 비둘기 고지 탈환에 투입됐는데 공격 때 따발총에 왼쪽 가슴을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쓰러지기는 했는데 가슴을 만져보니 멀쩡했다고 한다. 총알이 왼쪽 주머니에 달려있는 커다란 강철 단추에 맞은 것. 세간에 [[육탄10용사]]라 알려진 일화는 송악산 옆의 비둘기 고지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경상도]] 빨치산 토벌을 하던 2사단 25연대 1대대 2중대장으로 발령됐는데[* 당시 25연대장은 광복군 출신의 [[유해준]]이었고, 1대대장은 광복군 출신의 김용이었다.], 중대 간부들은 지원금을 횡령하고 병사들조차 빨치산과 서로 경쟁하듯 일대에서 약탈을 해 민폐를 끼치고, 점호도 하는 둥 마는 둥 군기도 엉망인 [[당나라 군대]]임을 파악하게 된다. 이에 말썽을 일으킨 이들에게 얼차려(기합)를 부여하고, 거리를 청소하는 한편 용모가 좋은 병사들을 골라 경계 지원에 적극 나섰으며, 횡령을 막고 약탈로 충당하던 부족분을 현지 주민들에게 정식으로 사들임으로서, 등돌린 민심을 회복하고자 진력한다. 덕분에 지역 주민들의 제보가 잘 들어오게 되었고, 이 경험은 훗날 남베트남의 대 게릴라전에 유용하게 활용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