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채명신 (문단 편집) === [[5.16 군사정변]] === 5.16 당시 채명신은 군인의 의무인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대한 복종을 자의적으로 거부했음은 물론 완전히 불법적인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시민으로서의 의무도 저버렸으며, 그 결과 정당한 민주적 절차로 성립된 [[제2공화국]]은 무너졌다. 이 일은 이상할 정도로 언급이 잘 안 되지만 [[12.12 군사반란]] 당시 9사단장 [[노태우]]의 행적과 빼다박은 것처럼 닮았다. 채명신을 명장이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참군인"으로 부르는 것은 불가능한 이유다. [[5.16 군사정변]]의 주역 중 하나로,[* 위 항목에서 소개된 후방 침투부대 백골병단을 이끌고 생환한 자리에서, 우연히 9사단 참모장인 박정희를 만났다고 한다. 적 후방까지 깊숙이 들어가 죽을 고비를 넘긴 무용담을 들은 박정희가 즉석에서 자신의 [[야전상의]]를 벗어 건네며 호감을 표한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쿠데타 초기 5인 위원회 위원 중 1인이다. 쿠데타 당시 철원 축선에서 전방을 지키던 [[제5보병사단|5사단]][[사단장|장]]이었음에도 직속상관인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이 직접 전화를 걸어 내린 병력 이동 및 서울 진입 금지 명령과 미8군 사령관 매그루더 장군과의 대면 자리에서 하달된 위치 유지 지침을 [[항명|완전히 무시하고]] 제36보병[[연대(군대)|연대]] 전체와 35보병연대 일부, 그리고 사단 직할대 병력을 빼내 서울에 입성한다. 본인 회고록에 의하면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에서도 혼란이 거듭되며, 몰지각한 기자들과 각종 민원에 시달리는 일이 반복되는 걸 겪어 쿠데타에 참가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다분히 자기미화 섞인 증언이고, 실제는 좀더 복잡했던 것 같다. 첫째가 박정희 소장과의 개인적인 인연이고, 둘째가 軍의 인사 문제(진급적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간혹 당시 이북(以北) 출신 장교들이 겪고 있던 견제/차별 문제도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1950년대 한국군 고위 장교단 양대 주류 파벌은 평안도 군맥(텍사스파)과 함경도 군맥(알래스카파)이었다. 적어도 이북 출신이었다고 차별받을 환경은 아니었다는 소리. 5.16 군사정변 이후 "텍사스 토벌작전", "알래스카 토벌작전" 등으로 이북 출신 장교들이 우르르 군복을 벗은 것도 이들이 원래 주류 파벌로 좋은 보직을 독식한 채 파벌다툼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명신이 5.16 이전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다면 그건 황해도 출신이라서지 이북 출신이라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 성공 2달도 안 되어, 같이 한강을 건넌 이북(以北) 출신 장교들이 [[장도영]] 참모총장의 체포[* 채명신이 본 장도영 총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끝까지 돕고자 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종필|젊은 장교]]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이렇게 이북 출신 장교들이 떠난 자리를 영남 등지의 '''"영리한"''' 장교들이 채웠다고.] 후 대거 군문에서 쫓겨나는 걸 보고, 당분간 이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방안을 궁리하게 된다. 때마침 그간 고위 장성들의 진급[* 5.16 성공 후 소장으로 진급했다.] 코스로 꼽히던 미 육군 지휘참모대 유학 과정이 있는 걸 알고 신청, 미국으로 유학을 감으로써 감투를 둘러싼 내부투쟁에서 비껴갈 수 있었다. 귀국한 후에는 채명신의 경험과[* 정규전, 적 후방침투 공작 및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게릴라전, 빨치산 토벌 및 6.25 전쟁 당시의 對게릴라전까지 다양한 싸움을 겪어본 장교였다.] 능력을 높이 산 박정희 대통령에게, 베트남으로 파병되는 파월 부대의 초대 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베트남 전쟁 관련 항목에 후술) 회고록에 의하면 자신이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 갈라서게 된 이유는 [[10월 유신|유신 헌법]]에 반대하고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대한 직언과 비판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대장(계급)|대장]] 진급 실패의 이유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 대외적으로도 3선 개헌을 반대했기에 강제 예편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개인적으로는 돈독한 사이였으며 3선 개헌을 앞두고 그를 불러서 의견을 물었을 정도. 그래서 5.16때 동기인 김재춘, 문재준, 박치옥과 함께 거사에 동참했고 강제예편당했음에도 박정희는 개인적인 호감 때문에 외교관으로 계속 기용할 정도였다.] 여담으로 [[장준하]]와 매우 친분이 깊었으며, 회고록에도 지면을 할애해 "사병들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정치인)은 그가 유일했다"는 찬사를 남긴다. 사회가 안정되면 민간인에게 정치를 맡기고 군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다른 5.16 참여군인들과 달리 채명신은 끝까지 군인으로 남았다. 중장으로 예편된 후에는 당시 예편 장성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외교관으로 부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