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채용신 (문단 편집) == 생애 == 채용신은 [[1850년]] [[2월 4일]] 한성부 북부 진장방 진장방계 삼청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서 아버지 채권영(蔡權永)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정겸(朴正謙)의 딸 사이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동근(東根)이고, 아명은 용덕(龍德). 채용신의 부친 채권영은 궁중에 참빗을 납품하게 되었는데, 이때 어린 채용신이 빗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맡았다. 그 솜씨가 워낙 탁월하여 그 소문이 궐내에 자자하였고, 이 소문을 들은 대원군의 요청으로 21세인 [[1871년]] 무렵에 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를 그렸다. [[대원군]]은 그가 그려준 초상화를 보고서 탄복했다고 한다. 채용신은 36세 되던 [[1886년]]에 [[과거 제도#무과|무과]]에 급제하였고, 그 전까지 사용하던 '동근'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용신(龍臣)'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의 관직재임 기간은 이때부터 [[1906년]] 정산군수직을 물러날 때까지 약 20년에 이르는데 중간에 두 차례의 공백기를 빼면 16년 간 관직에 있었다. [[1899년]] 49세 때 종3품 첨절제사 직에서 물러나 [[전주]]로 내려갔으나 [[1900년]] [[3월 23일]] 조석진(趙錫晋)과 함께 어진화가로 발탁됐고[[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7_03A_23A_00090|#]], [[태조(조선)|태조]]·[[고종(대한제국)|고종]] 등 왕의 초상화를 그렸다. 고종이 몹시 만족하여 중추원 의관에 임명됐다. 이 동안 그는 덕망 있는 선비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초상을 많이 그려주었다. 이후 종4품 정산군수(定山郡守)가 되었으나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통감부]]가 설치됨과 동시에 정산군수를 그만두고, 다시 [[전라도]]로 낙향하여 전업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1909년]] [[익산군]]에서 금마산방을 운영하였고, 이후 변산, [[고부|고부군]], [[나주군]], [[남원군]], 칠보 등지를 10여년 동안 전전하다가, [[1923년]] [[정읍군]] 신태인에 채석강도화소를 설립해 아들 채상묵, 손자 채규영과 함께 초상화 공방을 운영하며 정착하였다. [[1919년]] 채상묵이 [[경성부]]에 [[사진관]]을 개업하였고 그 아내 이홍경은 한국 최초의 여성[[사진사]]가 되었는데, 4년 후 정읍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아 잘 되지 않았던 듯하다. 이후 왕성한 작품 활동에 몰입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대부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 당시 제작된 작품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우국지사의 초상으로, 대개 대가 없이 그려준 것들이다. 둘째는 주문 제작화로써, 합당한 대가를 받고 그려준 것이다. 특히 후자는 광고전단지를 만들고 거기에 작품가격을 적어놓는 등 근대전업화가의 출현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서 사회사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말년에 주문을 받아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대부분 사진을 이용해 그렸다. 그는 먼저 사진을 20×25cm 정도로 인화한 후, 그 사진을 보면서 밑그림 없이 얼굴 모습대로 호분에 아교를 섞어서 채색하였다. 얼굴은 먼저 극세필로 그리고 머리와 몸체는 나중에 그렸다고 한다. [[1929년]](79세)에 그의 부인 [[전주 이씨]] 이용화(李龍華, 1863-1929)[* 이병림(李炳林)의 딸이다.]와 사별하였고, [[1941년]] [[6월 4일]] 채용신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묘소는 [[익산시]] [[왕궁면]] 장암리 선산에 있다. [[일본인]]들이 채용신을 높이 평가해, 그의 사후 3년만인 [[1943년]] 6월에는 일본인에 의해 유작(遺作)전이 경성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는 서울 화단에서 활약하지도 않았으며 도화서 화원도 아니었지만 왕의 그림을 그린 어진 화가였으며, 이후 양반출신 전업화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화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