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책계왕 (문단 편집) == 기타 == * 가뜩이나 [[기록]]이 적은 백제의 군주들 중에서도 특히 기록이 적은 군주들 중 한명이다. 재위 기간이 13년이나 되지만 기록이 대단히 짧다. 특히 287년 동명묘 참배 이후 298년 왕이 사망할 때까지의 '''12년 동안 기록이 없다.''' 또한 책계왕이 대방태수의 딸인 보과와 언제 [[결혼]]했는지조차도 불명이다. 대방태수의 딸과 결혼한 것은 고이왕 대에 낙랑군을 공격했던 것 때문에[* 낙랑태수 [[유무]]가 침략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하자 고이왕은 잡아왔던 낙랑의 [[백성]]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대방태수와 [[정략결혼]]하여 화근을 덜어보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중국 한사군인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왜 사이가 나쁜지는 당시 중국이 삼국시대 혼란기에 [[조위]]도 내리막을 걷던 시절이라 변방의 군현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 추정해볼 수도 있다. 문제는 책계왕 재위 후반부쯤 되면 중국에서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가 끝나고 서진이 등장해 이후 한사군 세력이 다시 [[부활]]해 반격을 시작한다는 점인데 책계왕이 [[목숨]]을 잃은 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추정된다. * [[풍납토성]]의 최초 개축 시점이 책계왕의 재위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고고학]]적 시료 분석이 있다. 분석 [[과학]] 제25권 제5호 2012.10 《OSL 연대 측정을 통한 풍납토성 축조 연대 산출이란 자료》는 풍납토성의 축조 연대 편년을 위해 각 [[토기]] 시료의 OSL 연대와 고고학적 맥락, 14C 연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풍납토성의 초축 시점을 294 ± 52 yrs AD (1σ SE), 제 III 단계 증축을 328 ± 30 yrs AD (1σ SE), 최종 [[성벽]]의 완성을 400 ± 76 yrs AD (1σ SE)로 비정한 바 있다. 294년이라는 연대에서 [[오차]]가 앞뒤 52년이니 고이왕 대에 개축했을 가능성도 있고, 이후 임금 대[* 최대 하한으로 미뤄보면 [[근초고왕]] 재위 초반까지 내려가기는 한다.]에서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으나 [[문헌]] 자료와 비교해볼 때 적어도 고이왕 대에 고대 [[국가]]의 모습이 갖춰져 풍납토성이 개축되었거나 고이왕 대에 개축이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책계왕 때에는 개축이 완료되었을 개연성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다. * 한편 풍납토성 발굴시 발견된 서진계 전문도기로 인해 풍납토성의 최대 상한은 3세기 4/4분기로 유력하게 추정되고 있다. 즉 275~300년이 최초 개축 시기로 추정된다는 얘긴[*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시리즈 1권 참조]데, 이 또한 앞서 시료 분석 결과와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