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궁보 (문단 편집) === 최후 === [[태평양 전쟁]] 종결 이후 천궁보는 성명을 발표, "나는 국민정부군이 광복지구로 들어올 때까지 치안을 유지하여 국민정부군에게 광복지구를 물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처분에 따라 과거의 죄과를 속죄하고 싶다."라고 하였으나 8월 28일 독약을 먹고 중태에 빠졌다가 8월 29일에 끝내 죽었다거나 8월 25일 막국강, 란바이성, 하병헌, 진군혜, 잠덕광, 주륭상 등 9인과 함께 일본 오나구를 거쳐 도쿄로 도주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정확한 행방을 알 수 없는 처지였다. 8월 12일, 주중 일본대사 다니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음을 알리고 천궁보에게 일본 망명을 권유했으나 천궁보는 "주석으로서 정부관계자의 안전을 끝까지 지켜볼때까지 난징을 떠나지 않겠다."고 이를 거절했다. 8월 21일, 국민정부와 종전협상에 임한 지나파견군 총참모부 소장 이마이 다케오는 중국 측에 일본에 부역한 한간들이 민심을 살핀 공도 있으니 관대한 처분을 원한다는 요청을 전달했으나 국민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를 보고받은 천궁보는 "나는 소년 시절 혁명에 투신한 이래 생사의 갈림길을 수도없이 들락거렸기 때문에 언제라도 각오는 되어 있다. 따라서 이번에도 어떤 특별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라고 답하였다. 하지만 해군부장 임원도의 권고로 자신이 난징에 있으면 충칭정부가 점령지를 접수하는 것에 방해가 될것이라는 이유로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의사를 이마이 다케오에게 전했다. 이마이 다케오는 천궁보를 일본으로 빼내면 장제스가 격노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수락하였다.[* 여기서 한가지 재밌는 것은 임원도는 일본이 패망하고 제일 먼저 국민혁명군 전진지휘소를 선언하고 장제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천궁보는 일본으로 가라는 임원도의 개인적인 제안을 장제스의 의사로 착각했을 수 있다는 분석이 있다.] 8월 25일, 국민혁명군의 난징 진주가 임박해오자 천궁보는 부인 이여장, 여비서 막국강, 정부요인 주륭상, 린바이성, 진군혜, 하병헌, 군사고문 오가와 대위를 대동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천궁보는 장제스의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서 자신은 일본으로 망명하는 것이 아니라 허잉친이 난징을 접수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답시 떠나는 것에 불과하며 자신을 부른다면 언제든지 중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려 했으나 편지를 맡았던 일본군 참모의 실수로(...) 편지가 전달되지 않았다. 원래 천궁보는 칭다오를 경유하여 연료를 보급받고 일본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연합군이 8월 25일부로 일본 비행기의 비행을 금지한다고 선포하자 연합군에게 격추되지 않기 위해 연료 보급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직항하였다. 25일 오후 1시, 천궁보는 일본 해군의 미호 기지에 착륙했으며 오나고 시장 사이토의 보호를 받았다. 오나고 시민들이 지나인 스파이들이 나타났다면서 죽창으로 무장하고 천궁보 일행을 죽이려 했으나 시장의 보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9월 1일, 천궁보 일행은 교토로 거처를 옮겼는데 일본 외무성이 호텔을 마련해주었으나 눈에 띤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별장에 숨어들었다. 9월 8일에는 [[금각사]]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천궁보는 권총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부인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9월 9일, 허잉친이 [[오카무라 야스지]]에게 천궁보를 즉각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 측의 요구가 계속되자 9월 20일, 오카무라는 허잉친의 요구를 상부에 전달했고 9월 25일, 천궁보는 중국비행기를 보내준다면 제발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10월 1일, [[고노에 후미마로]] 전 수상과 회담을 가진 천궁보는 숨겨주겠다는 일본인 지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병을 앓고 있던 부인 이여장을 일본에 두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마침 실수인지 국민정부는 이여장의 송환만은 요구하지 않았다. 이여장도 11월에 중국 귀국을 결정하였으나 장강에 도착하였을때 한무리의 중국 헌병들에게 연행되었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원래 린바이성을 비롯한 일행들도 모두 일본에 숨기려 했으나 이들이 모두 잔류를 거절하여 다 같이 귀국을 결정하게 된다. 천궁보는 후쿠오카를 경유하여 다음날 난징 대교기지에 도착한 후 난징 시민들과 중국 헌병들의 욕설, 침세례를 받으면서 죄수로 전락하였다. 1946년 초, 천궁보는 저민의, [[천비쥔]]과 함께 쑤저우 사자구에 위치한 강소성 제3교도소로 이감되었다. 4월 5일, 천궁보의 재판이 시작되었고 괴뢰정부 수립, 괴뢰군 조직, 아편 매매, 영미에 대한 전쟁선포, 매관매직, 적에 대한 물자 공급, 가짜 화폐의 발행, 적을 위해 장정을 징집, 국민에 대한 노예화 교육, 항일애국자 살해 등 10가지 매국을 저지른 죄로 기소되었다. 천궁보는 자신의 죄를 열렬히 변호했으나 4월 12일, 10개 죄목에 대해 모두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 공권 몰수, 가족들의 생계를 제외한 최소한의 자산을 제외한 나머지 재산 몰수가 선언되었다. 천궁보는 항소 의사가 없다고 했으나 이여장이 대신 항소하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여장의 항소를 기각하고 5월 14일, 사형을 확정하였다. 이에 대해 상하이와 난징의 시민들은 "죽일 필요는 없다", "죽이긴 아까운 인물이다"라고 동정을 표했다. 6월 3일 오전 8시, 검찰관이 천궁보를 호출하였고 천궁보는 죽음을 직감하고 푸른 장삼에 흑색 비단바지, 검은 구두로 갈아입었다. 옆방에 구금된 저민의와 여죄수동에 수감된 천비쥔과 악수하고 작별인사를 하였는데 이때 천비쥔은 "뜻밖에도 우리 세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이리로 옮겨와 당신이 먼저 죽음을 맞게 되었다. 더구나 당신의 죄보다 나의 죄가 중대한데... 당신은 희생된 것이다. 당신 집안의 앞으로의 문제는 내가 전력을 다하여 뒤처라하겠다"고 울부짖으며 배웅했다. 형장에 선 천궁보는 유언이 없냐는 질문에 자신이 유언장을 반밖에 작성하지 못했으나 굳이 더 작성할 필요는 없다고 답변했다. 가족에 대해 검찰관이 더 묻자 어서 형을 집행하달라고 하면서 다만 손은 묶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검찰관, 서기관, 교도관 등과 모두 악수한 후 자신의 형을 집행할 형리 주굉범과 마지막으로 악수한 후 후두부에 총알이 맞아 오른쪽 뺨을 뚫고 나간 후 절명했다. 검찰처 검시관 왕춘영이 [[사망진단서]]를 끊어주었고 시신은 그날 저녁 유족에게 인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