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궁보 (문단 편집) === [[중일전쟁]] === 왕징웨이와 더불어 항전이 중국의 멸망만 앞당길 뿐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천궁보는 전쟁 시작 직후 [[후스]], [[천부레이]], [[저우포하이]], [[슝스후이]], [[타오시성]], 가오중우 등과 함께 저조구락부를 조직하여 화평운동을 전개했지만 장제스의 항전 정책 고수에 일본이 뭔가 고통을 느낄 때 쯤이면 중국은 이미 죽어 있을 것이라고 빈정거리는 등 항전정책에 반발했다. [[트라우트만 공작]]이 실패한 이후 예문연구회를 발족하여 일본과의 독자적인 화평교섭에 들어갔다. 결국 1938년 [[왕징웨이 공작]]에 호응, 1938년 11월 29일 청두에 있다가 충칭으로 가서 왕징웨이와 마지막으로 의논한 다음, 왕징웨이와 같이 충칭을 탈출해 쿤밍과 하노이를 경유, 일본 점령지인 상하이로 들어가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하여 입법원 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왕징웨이 정권은 왕징웨이 일파의 순진한 발상과 달리 괴뢰정부에 불과했으며 왕징웨이 일파에게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 가오쭝우 등은 일본에게 배신당했다고 길길이 날뛰다가 [[다이리]]에게 포섭되어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버렸고 [[저우포하이]]는 항전파가 옳았다고 절망하다가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아예 충칭의 국민정부와 접촉해서 일본군 뒤통수를 깔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41년 2월 동아연맹중국총회가 설립된 이후에 상무이사에 추대되었다. 1944년 왕징웨이가 죽고 난 이후에 주석대행 겸 행정원장을 맡게 되었지만 실권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면서 1944년 9월 5일 최고전쟁지도회의는 충칭에 대해 정치공작을 실시하여 중국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 왕징웨이 정권을 포함한 중국에서 철병하는 대신에 만주국에 대서 현상 유지를 충칭에 제시했다. 이때 천궁보는 일본 육군차관이자 왕징웨이 정부의 전 고문인 시바야마 켄시로에게 중국의 '호의적인 중립'을 얻기 위해 난징 정부를 해체할 수 있다는 통보나 받게 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일본 제국]]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원자탄 두방]]과 [[만주 전략 공세 작전|소련군 세례]]를 맞고 요단강 건너면서 그의 몰락도 같이 다가오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