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도교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전신인 동학이 구한말 반외세적 성격을 강하게 표출했듯이, 천도교 또한 [[일제강점기]] 들어 일제에 맞서 활약한다. 가장 유명한 업적으로서 1919년 [[3.1 운동]]을 가장 앞장서서 주축이 되어 주도했으며, 1920년부터 1926년 사이에는 기관지인 [[개벽(잡지)|개벽]]을 간행하여 민족 정론지로 발돋움시킨다. 이러한 배경으로 1920년대 이후 발흥하였던 [[사회주의]]세력이 천도교를 좌우합작을 위한 민족주의세력의 대표로 인식하였다. 이는 종단이라는 특성상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단체보다도 재정적인 능력이 컸기 때문이었다.이러한 인식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소련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소련공산당은 한반도 내부의 사회주의 세력에게 천도교 세력과 함께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6.10 만세운동]]이었다. 또한 '''[[어린이]], [[여성]]의 [[인권]]은 물론 심지어 [[지구]] [[환경]]까지 존중(천지부모 일체설)하는 상당한 선구자적 안목'''을 갖고 있었다. 당시 천도교의 활약은 [[어린이날]] 지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대표적인 천도교인이다. 그는 당시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의 셋째 사위였다. 게다가''' '어린이'라는 용어 자체가 천도교에서 만든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어린이에게 경어 사용 역시 천도교가 만들고 시작한 것이다. [[동덕여자중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동덕의숙도 천도교에서 설립한 일종의 [[미션스쿨]]이었다. 또한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원도 [[이용익]]에게서 [[김성수(1891)|김성수]]가 인수하기 전까지 천도교에서 운영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