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도교 (문단 편집) === 신구파 갈등과 신파의 친일 행적 === 손병희를 수반으로 하는 대통령제 임시정부가 대한국민의회에서 조직되었다는 설이 인터넷에 돌아다니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시 대한국민의회는 __[[소비에트]]__ 제도를 수용하였기에 단순한 의회기능뿐만 아니라 사법, 행정의 기능까지도 통일적으로 공유한 조직이었다. 따라서 의회와 구분되는 내각, 즉 행정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부분은 이미 1988년에 반병률의 실증적인 연구로 충분히 반박되었고, 현재 학계에서도 대한국민의회에는 별도의 대통령제 임시정부가 없었음이 당연한 통설이다. 여전히 웹상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정보가 돌아다닌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1922년 [[손병희]]가 사망한 후 천도교 내부는 엄청난 갈등에 휩싸였는데, 이를 '신구파 갈등'이라고 칭한다. 기존 독립투쟁 노선을 따르던 손병희 계열 구파와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을 주장한 [[최린]] 계열의 신파간 갈등이 심했다. 그래도 신구파 갈등이 심각함을 신파와 구파 모두 알아서 1930년대 초반 일시적으로 신구파가 통합됐지만 얼마 안 가 다시 분열되었다. 이후 신파가 천도교를 장악해 천도교는 [[3.1 운동]] 시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아주 노골적인 친일 종교로 변질되었다. 자치론과 일선동조론을 받아들이며 노골적인 친일파로 전향했고, 그 거두가 최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에 반감을 가진 일반 신도들을 억지로 동원해가며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사종교단체 취급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끌려간 최린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는 말도 있다.[* 심문장에서 자기변호에 바쁜 [[이광수(소설가)|이광수]]를 향해 '''입 닥쳐!'''를 외친 일화로도 유명하다.] [[일진회]]도 엄밀히 말해서 이쪽 계열이다. 애시당초 동학이 이름을 천도교로 바꾼 이유가 손병희가 일진회 창립 멤버인 이용구와 손을 끊으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구파는 반일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무인멸왜기도운동(1938년 무인년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일제에 적발되어 구파의 세력이 거의 사라졌다. 신구파가 혁파된 것은 [[8.15 광복]] 이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