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도교 (문단 편집) === 해방과 군사정권 시기 === 해방 후에는 세력이 급속히 미미해져 현재는 꽤나 [[마이너]]한 종교가 되었다. 이는 앞에서도 설명했듯 지독한 신구파의 갈등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와중에서 조직과 세력이 대부분 와해되었고, 신도의 '''상당수가 [[북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당시 북한지역에는 천도교도가 150만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 수치는 북한의 다른 종교 신자를 합친 수보다도 많은 수였다. 천도교 다음은 37만 5천명의 [[불교]].(북한 "조선중앙연감", 1950).]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6.25 전쟁]] 직후 월남한 천도교인들이 많았고[* 1920년대까지만 해도 무려 300만이라는 신도 수를 보유했고, 그 이후로 신도 수가 대폭 하락했음에도 60년대 당시 기록에 따르면 무려 60만명이 넘는 천도교인들이 월남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 때[*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이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영향으로 박정희 개인은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 정권의 지원으로 인해 교세 재건을 시도했다.[* 대표적인 예로 수운회관 건립, 용담정 정비 등이 있다.] 이 시기 1960~1970년대 당시 천도교는 '반공종교'라는 이름하에 친정부 성향을 가진 종교였고, 교령에도 정계와 닿은 사람들이 많이 앉으면서 종교집단보다는 정치집단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가톨릭]], NCCK계열의 [[개신교]]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을 때 천도교는 [[불교]]와 함께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흑역사가 있다. 1978년 천도교 춘천교구장이 유신정권에 반대해 분신 자살한 것이 거의 유일한 민주화 운동 참여다. 그러나 [[거창 양민 학살사건]]에 개입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여 서독 대사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최덕신]] 교령이 1986년 4월에 월북하는 사건이 터졌고, 천도교 교단은 이 사건에 타격을 받아 거의 교세가 무너졌다. 거기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 1997년 8월 [[오익제]] 교령(2012년 9월 1일 북에서 사망)의 월북 사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