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동설 (문단 편집) === [[지동설]]의 등장과 천동설 폐기 === [[파일:attachment/Screen_Shot_2013-10-03_at_3.20.33_PM.png]] 프톨레마이오스 모델로 설명한 '''[[금성]]'''의 궤도. 천동설에 대비되는 지동설은 기원전 2세기 아리스타르코스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주요 가설 중 하나로 취급되었으나(대표적 사례가 [[아르키메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 개념이 널리퍼지면서 한동안 사장되어 있다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의 천문학자들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된다. 또한 [[초신성]]과 [[혜성]]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기존까지 있던 '완벽한 천상계'라는 개념에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으며, 금성의 위상 변화 등 기존 천동설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로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지동설이 채택되는 일은 없었다. '''초기 지동설 모델은 천동설보다도 더 번잡했기 때문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는 주전원을 27개 썼지만 코페르니쿠스는 46개를 썼다. 주요한 원인은 코페르니쿠스가 원운동이 아닌 다른 궤도를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지동설 역시 초창기에는 관념적인 모형 만들기를 중시하였으며, 천체의 운동은 '당연히' 완벽한 원이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에 빚어진 한계였다. 둘째는 역학의 문제였다. '''당시에는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세상 모든 물체가 우주의 중심으로 가라앉으려 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중력 개념에 익숙한 현대인들 입장에선 어색해보이겠지만,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 이론이 지동설보다 더 나중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또한 [[관성]]의 개념도 없었던 당시 시대 상, 흙이 뭉쳐져 만들어진 지구가 움직이는데 부서지지 않는 것도 설명 불가능했다. 거기에 더해 지구가 움직이는데 그 누구도 그 움직임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이것은 실제로 [[코리올리 효과]]로 나타난다. 당시의 관측 기술로는 관찰하기 힘든 현상이었던 것이다.]과도 모순이었다. 그래도 지동설에는 프톨레마이오스식 천동설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천동설을 유지하면서도 그런 천체 현상을 설명 못 하는 게 아니었다. [[티코 브라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개선해 자기식 천동설을 내놓았는데, 이 천동설은 '달만 빼고 모든 행성이 태양 주변을 돈다, 하지만 달과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이론이었다. 그리고 이건 코페르니쿠스식 지동설보다 '''정확했다'''. 브라헤가 지동설을 검토해보긴 했으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당시까지는 가장 정확한 관측 데이터에 따르면 '지구가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연주시차]]의 값이 0이면 천동설이 옳은 것이고, 0보다 크면 지동설이 옳은 것이다. 그런데 브라헤가 잰 연주시차는 0이었고, 따라서 천동설은 유지되었다. 실제로는 연주 시차는 0보다 크지만 그 값이 너무 작아서 당시 기술로는 이 작은 값을 관측해내지 못하고, 그냥 0으로 나왔던 것이다. 다만 여기까지 왔으면 '왜 다른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도는데 지구만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라는 질문과 '상대성 원리에 비춰 태양이 가만있고 지구만 움직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는 의문이 생기기에 지동설로 이행하기 위한 밑바탕이 갖춰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케플러도 티코 브라헤의 태양중심 우주관과 타원 가설이 없었다면 케플러 법칙과 지동설을 증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지동설이 본격적으로 역전한 것은 [[요하네스 케플러]]의 시대였다. 케플러는 행성들의 원 운동이 보여주는 완전한 세계관에 이상을 갖고 티코 브라헤의 아래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그런데 이후에 티코 브라헤의 비협조로 얻지 못하던 관측 자료를 들어 연구하다보니 예측되었던 것과 8분[* 원을 360도라고 할때 그 도(degree)의 또 60분의 1이 '1분'이다. 8분을 도로 환산하면 고작 '''0.133도'''. 당시 브라헤의 관측은 정밀하기로 유명했다.]의 각 차이가 있었고, 여기에 케플러는 매우 좌절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연구에 나선 끝에 1618년에 '''[[케플러의 법칙]]'''을 정립했다. 케플러의 법칙은 지동설을 기초로 행성의 '''타원''' 운동(이는 기존의 '완전한 원 운동'의 관념을 뒤엎는 혁신이었다.)을 분석하여 내놓은 3개의 가설이었다. 하지만 천동설이 완전히 폐기되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아이작 뉴턴]]의 [[역학]] 덕분이었다. 상기했듯 지동설을 받아들이면 당대인들이 관찰해서 알아낸 [[역학]]과 많은 모순이 발생했기 때문에 많은 거부감을 샀다. 당대의 역학 중 [[임페투스 가설]] 이라는 유력한 가설이 있었다. 임페투스 가설로 행성들이 왜 원운동을 하는지에 설명할 수 있지만 타원형 궤도는 설명할 수 없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모델이 행성들의 궤도를 '당연히 아름답고 완벽한 도형인 원이겠거니' 하고 넘어간 원인에는 임페투스 가설의 영향도 한몫 했다. 요하네스 케플러 역시 역학에서는 별다른 말을 안 했고 그냥 '수학적으로 아름다우니까' 라는 매우 관념적인 주장만 반복했다. 때문에 케플러의 모델은 매우 정교하고 정확하게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가설로 간주되었으나 아직 '법칙'으로까지 여겨지진 못했다. [[아이작 뉴턴]] 항목에서도 자세히 설명하지만, 뉴턴의 역학을 통해 '지상의 역학'은 물론 (당시 관측 가능한) '모든 우주의 역학'이 동일함을 설명할 수 있게 되어서 천동설이 드디어 폐기된다. 이 공로로 뉴턴은 당대부터 이미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인간이 결국 온 세상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광행차가 1674년 로버트 후크에 의해 처음 관측되고 1729년 제임스 브래들리가 해석하며 천동설에 관뚜껑을 덮었고 1838년 프레드리히 베셀이 [[연주시차]]를 확인하면서 관뚜껑에 못을 박아버렸다. [[유리 가가린]] 등 우주인들이 지구 밖으로 나가본 것으로 지동설을 관측할 수는 없다. [[유리 가가린]]이 직접 가본 우주인 지구 궤도에서는 지상에 있는 인간이 관측하는 것과 별 차이 없는 천구를 그릴 수 있을 뿐이다. 지구의 자전을 관찰하려면 [[달]]까지 가야 한다. 태양과 지구의 각도가 유지되면서 지구가 자전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주인이 지구의 구형 모습을 직접 관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관측을 근거로 [[지구 평면설]]을 반박할 수 있다는 말은 맞다. 이는 천동설과 지구 평면설이 과거의 천문 이론으로 패키지로 묶여서 알려진 탓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