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상병 (문단 편집) === 청년 시절 === 1930년 1월 29일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아버지 천두용(千斗用, 1900. 9. 8 ~ ?. 9. 3)과 어머니 김일선(金日善)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 막내로 태어났다. 1934년에 잠시 귀국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남도]] [[창원시|창원군]] [[진동면(창원)|진동면]] 진동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창원)|진동면]] 진동리) 287번지에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26673#home|본적을 두고]] 거주하면서 1937년 진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2년을 다니다가 1940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간사이]]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치바현]]에 있던 아와(案房)중학교에 입학하여 다녔다. 이처럼 천상병은 자신의 유년시절은 거의 일본에서 보냈다. 1945년 8월, 광복이 이루어지면서 부모와 함께 귀국하여 [[경상남도]] [[마산시]](現 [[창원시]])에 정착하였고, [[마산고등학교|마산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중학생 시절인 1949년, 그의 시인 〈공상(空想)〉이 《죽순(竹筍)》 11집에 추천으로 실리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또한 이때 담임교사의 추천으로 그의 또다른 작품인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되어 실리기도 하였는데, 당시 담임교사가 바로 '''[[유치환]]'''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전란 와중이었던 1951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지금은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경제학부|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 산하)에 입학하여 송영택·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인 《처녀》지를 발간했다. 1952년, 《문예》지에 〈갈매기〉가 추천을 완료받아 시인으로서 정식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1953년, 《문예》지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 · 〈사실의 한계〉 등의 평론을 발표하는 등 시 문학 뿐 아니라 평론 방면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54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4학년 1학기 때 중퇴하였다. 이후 1956년, 《현대문학》지에서 집필을 하였고 외국서적을 몇 권 번역하기도 하였다. 1964년에는 [[김현옥]] 당시 [[부산직할시장]]의 공보실장으로 재직하였는데 이것이 천상병의 생애에 월급쟁이로 직장생활을 한 유일한 이력이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성향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천상병은 그마저도 2년 만에 그만두게 된다. 1960년대 당시의 천상병은 주로 서울 [[명동]] 거리를 드나들며 또래의 문학인들과 어울리고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일정한 거처가 없었으므로 친분 있는 지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더부살이를 하거나 여인숙에 묵기도 했다. 당대의 사람들은 바로 이 천상병과 [[김관식]], 그리고 [[이현우]] 등을 문학계의 3대 기인으로 꼽기도 하였다. 김관식은 시인 서정주의 동서였는데 당시 문학계의 대선배였던 월탄 박종화를 "박군"이라 칭하는 등 독설을 잘 퍼붓기로 유명했다. 이현우는 당대의 베스트셀러 소설가 김말봉의 의붓아들이었는데 안정된 생활을 때려치우고 스스로 떠돌이가 되었다가 80년대 이후에는 아예 종적을 감추어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