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철종(조선) (문단 편집) == 평가 == 철종은 명암이 분명한 [[조선/왕사|군주]]이다. 철종은 역대 조선왕조의 왕들 중 피지배층 백성들의 삶과 그 고통을 가장 잘 알고 공감하고 있는 왕이었기에 백성들에게 동정적이었고 무너져가던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나 선대 왕인 [[헌종(조선)|헌종]]이 외가나 처가 등을 통해 정치적인 기반을 가지고 세도 가문을 견제해가며 나름 왕권을 구축했던 것에 비해 '''[[방계]] [[왕족]]''' 출신인 철종은 그런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에 개혁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조선/왕사|정통성]]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선 양모인 [[순원왕후]]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엄청난 핸디캡을 안고 있었다. 오히려 이만한 핸디캡을 안고 삼정이정청 설치 등의 성과를 낸 것만도 역량이 없는 인물은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대인 [[헌종(조선)|헌종]]에 비해 정치적인 역량은 많이 뒤쳐졌다고 볼 수 있다. [[세도 정치]]라고는 하지만 세도 가문들이 [[고려시대]] 무신정권도 아니고 국왕의 역량에 따라 충분히 통제할 수도 있었다는 게 중론이기 때문이다. [[헌종(조선)|헌종]] 때에는 국왕이 세도 가문끼리 경쟁 구도를 만들어 세도가들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모습이 있었으나 철종 때에는 이러한 모습 없이 사실상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가 독주하는 모습이 만들어졌던 것도 그만큼 역량 면에서 철종이 선대보다 뒤떨어졌던 것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철종은 [[방계]] [[왕족]]이기에 [[순조]]의 적장손인 [[헌종(조선)|헌종]]에 비해 [[조선/왕사|정통성]] 면에서 큰 핸디캡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헌종(조선)|헌종]] 때에 세도 가문 간에 균형이 맞추어졌던 것에 비해 철종 치세의 모습은 갭이 너무 심하기는 했다. 이는 [[조선/왕사|정통성]] 외에 국왕 스스로의 역량이 선대에 비해 낮아진 것도 한 몫할 수밖에 없다.][* 사실 [[조선]]에서 왕이 되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맨투맨으로 붙어 공부와 시험을 계속 치러야했고, 일정 이상의 학문과 무예를 갖추지 않으면 안됐다. 실제로 철종 전까지 왕들은 대부분 짧게나마 [[왕세자|세자]] 기간을 거쳤고, 방계 왕들도 선대 왕의 조카거나 동생인 식이라 왕자로서 예법이나 교양은 갖췄다.[* [[정종(조선)|정종]]은 허수아비 왕이니 제외, [[태종(조선)|태종]]은 고려시절에 과거급제를 할만큼 똑똑했고 [[세종대왕]], 말할 것도 없다, [[세조(조선)|세조]]는 적어도 능력은 꽤 다재다능했다고 하며 [[성종(조선)|성종]]은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중종(조선)|중종]]은 그나마 특출난 면은 없고 [[선조(조선)|선조]]는 그 17세의 나이에 [[명종(조선)|명종]]의 테스트를 조리있게 통과했고 [[광해군]]은 [[임진왜란|전란]]시기 [[분조]]를 이끈 경력이 있고 [[인조]]도 특출난게 없지만 [[인조반정]]을 직접 성공시킬만큼 능력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효종(조선)|효종]]은 특별히 세자 이전인 대군시절부터 유능했다는 기록은 안 보이지만 [[조선/왕사|왕]]으로서 행적은 그가 유능했다는걸 보여준다. [[영조]]도 말할 것 없이 유능했고. 헌데 이들 모두가 [[조선/왕사|왕]]이 되기 전에도 [[왕족]]으로서 대우를 똑바로 받으며 기본 예법이나 교양을 익힐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철종만 여런저런 사유 등으로 이런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출생부터 즉위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던 일반인에 가까운 [[방계]] [[왕족]]으로 19세까지 살던 철종에게 이런 복잡한 정치판을 개혁할 역량을 기대하긴 애초에 무리이다. 비유하자면 다른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개 빡세게 공부를 해서 들어가는 [[서울대 법대]]&[[서울대 의대]] 등에 중·고등학교 시절에 농사만 지은 19세 무학 청년을 억지로 넣어놓은 꼴이다. 철종과 마찬가지로 일반인 출신에 12살에 [[조선/왕사|왕위]]에 오른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그래도 머리가 좋고 준비도 철저했던 막강한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존재가 있어서 괜찮은 편이었다. 거기다 12세라 아직 기회도 충분히 있었고. 준비도 전혀 안 하고 도와줄 가까운 사람도 전무한 사람이 [[조선/왕사|왕위]]에 올랐으니 역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치세 후반으로 갈수록 자포자기하듯 문란한 생활을 하며 정치에서 손을 땠던 것은 분명 [[명군]]이 아닌 [[암군]]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딱히 왕으로서 뭘 더 해볼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다. 명군이고 암군이고간에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제한되어있는 마당에, 이분법적인 평가를 들이미는 것은 비합리적일뿐더러 학술적으로 큰 의미도 없다. 오히려 지극히 취약한 권력기반을 가지고도 개혁을 시도라도 해봤다는 것을 어느정도 감안해줄 필요가 있다.[* 이는 선대 왕인 [[헌종(조선)|헌종]]도 마찬가지였다. 두 왕 모두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문란한 성생활을 하며 정치와 멀어지다가 요절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허나 [[헌종(조선)|헌종]]의 경우 정말 [[성욕|여색]]에 빠졌다기보다는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전횡에 질려서 다음 후대만큼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출신]] [[조선/역대 왕비|왕비]]에게서 자식을 보지 않겠다는 의지를 무언으로 표명했다는 말도 있고 또 저러면서도 나랏일은 나랏일대로 성실히 보았다. [[헌종(조선)|헌종]]은 친정 이후 꾸준히 [[왕권]] 회복을 시도했으며 [[1849년]](헌종 15년), 본인이 죽기 직전에는 외척들에게 넘어가있던 병권의 상당수를 회수했을 정도. 병권은 어느시대나 권력에 직결되어 있는 만큼 그만큼 [[헌종(조선)|헌종]]이 왕권강화를 위히 힘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849년]](헌종 15년)에는 병조의 수장인 병조판서나 오군영의 수장들을 모두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앉히기까지 했다.] 종합해보면 [[조선/왕사|왕]]으로써의 역량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나 [[정조(조선)|정조]] 말년부터 터져 나온 [[조선]] 사회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수습해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