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나라/역사 (문단 편집) === [[조선]] 복속과 [[명]]의 패퇴 === [[정묘호란]]을 통해 사실상 [[조선]] 문제를 쉽게 정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홍타이지는 1635년 12월부터 '봉서(奉書)'와 '치서(致書)' 문제를 트집잡고 공경을 요구했으며, 1636년 2월에는 자신의 존호례에 조선국왕의 동참을 요구하며 군신관계 수립을 추진했다. 이른바 '대명의리’를 기조로 삼고, 모문룡의 전폭적인 원조 및 후금과의 교섭 단절로 정권을 시작한 인조 정권은 크게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화친이 단절되어 전쟁에 대비할 것을 알리는 인조의 교서가 청 측에 입수되고 뿐만 아니라 4월 존호례에서 조선 사신들이 고두를 거부하여 양국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다. 홍타이지는 친정을 통해 삼전도에서 조선국왕의 항례를 받아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고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켰다. 이후 청나라와 명나라는 본격적으로 양국의 국운을 건 전쟁을 계속한다. [[명청교체기]] 혹은 명청전쟁이라 불리는 치열한 전쟁에서 청나라는 대승을 거두고 명나라를 연전연패의 길로 몰아 넣는다. 청 제국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여세를 몰아 1621년에 요동을, 1636년에 막남의 칼카 5부와 차하르 등에 대한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1642년에 [[송산 전투]]에서 승리하여 만리장성 동북 지역을 석권했다. 1629년부터 1643년까지는 여섯 차례 화북을 공격하여 무인지경으로 약탈함으로써 기근과 대규모 반란으로 마비된 행정력에 더욱 악화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북경을 포위하기도 했다.[* '''기사년의 변'''이라고 부른다. 청군은 영원성을 방비하던 원숭환이 급히 지원하자 한 발 물러서 퇴각했다. [[원숭환]] 참조.] 청나라는 계속된 승전으로 명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결코 명나라를 멸망시킬 수준의 국력은 아니었다. "군사력 = 국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청나라는 기병 중심의 군대이기 때문에 당연히 회전에서는 보병 중심의, 그것도 쇠퇴한 명군을 압도했다. 하지만 반대로 [[공성전]]에서는 기병의 효력이 나오기 어려우며, 명나라와 달리 화기를 다수 보유한 것도 아니었기에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다. 결국 청나라는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산해관을 격파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특히 명나라는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인구에서 여전히 청나라보다 압도적이었으며 오래전부터 서양과의 접촉 덕분에 홍이포와 같은 신형 화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신흥 국가인 청나라는 명나라에 비해 국가의 역량이 한참 모자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