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년실업/원인 (문단 편집) === 사무직 선호현상 === 한국은 삼국시대 정도만 해도 고구려 [[미천왕]]이 소금장수를 해보았다든가, 신라 왕족인 [[비형랑]]이 자기의 손으로 직접 건물을 짓는 도깨비에게 벼슬을 주니 일을 잘했다는 설화가 있었고, 백제의 [[아비지]]의 이름이 전근대에 내려오는 가장 유명한 건축가의 이름이며, 통일신라에도 [[장보고]] 같이 교역으로 권력을 차지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고려]] 초기 [[과거 제도]] 도입을 시작으로 사무직과 비슷한 문벌이 높은 사람들이 권력을 주도했다. 이때도 문벌귀족 김부식 아들 [[김돈중]]이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그슬리며 모욕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신진 사대부가 권력을 잡은 [[조선 왕조]] 500년 내내 글을 쓰는 직업, 문(文)을 우대하고 나머지 직종, 무(武)를 비롯한 기술, 의술, 상업, 예능 등을 다소 천하게 여겼다. 그래도 조선 초기까지는 [[장영실]]처럼 기술자가 예외적으로 능력을 인정받거나, 능력이 있는 중요한 [[목수]]는 벼슬도 받았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혼란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다양한 직업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성리학]]이 국교화되는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시와 소설, 산문 작문 능력, 글씨체 등의 기술을 중시하는, 훈구파와 초기 사림파 내에서 인정되는 사장학 역시 천한 기술로 여겨져, 도학, [[성리학]] 경전을 연마하여 심신 수양과,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문제 이외에는 잡기 정도로 취급되었다. 문(文), 도학 위주, 학문으로 하는 일을 귀하게 여기는 현상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1910년 [[대한제국]]이 붕괴되고 1945년 광복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과거 문(文)과 학문 위주의 직업이라 볼 수 있는 사무직에 대한 선호현상은 계속되었다. 다만 경제발전이 진행되면서 시와 소설, 산문 작문 능력, 글씨체 등의 기술을 중시하는 사장학도 다시 인정받아지고 있고 상업, 의술, 기술, 예능에 대한 선호도 역시 크게 늘었다. 다만 후자의 경우는 20세기 후반 들어서 선호가 생겼고, 예능은 21세기가 되어서야 제대로 선호 받기 시작했고, 상업도 [[영업]] 같은 분야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여전히 크게 선호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직업 교육이 아닌 학교 공부 이외의 방식으로 돈을 버는 일은 수입이 많아도 다소 낮게, 학교 공부를 잘해서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은 높게 여겨지는 인식이 있다. 군사독재정권의 과도한 경제성장 성과 욕구로 억지로 육체노동과 프랑스, 독일, 중동 등에 건설근로자, 광부 등으로 파견된 세대들 역시 주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고되고 힘들다 하여, 자녀들에게 사무직 계통으로 일할 것을 희망하였고, 미디어 매체에서도 검열을 이유로 잘나가는 사무직의 생활만 다루며 이러한 현상을 부채질했다.[* 보통 이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예시가 <[[TV 손자병법]]>이다.] 결과적으로 땀 흘리는 일, 손에 때 묻는 일이 천시되는 현상은 21세기까지도 계속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