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성잡기 (문단 편집) === 유자(儒者)들의 역사 왜곡 === 성대중은 유학자들이 사실을 왜곡하는 것도 비판했다. >유자는 세 치 붓으로 백세(百世)의 권한을 마음대로 부린다. 역사의 평가가 그들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어, 좋아하면 하늘 높이 추어올리고 유감이 있으면 구덩이 속에 밀쳐 넣는다. 은밀히 써서 비밀리에 전하며 근거 없는 증거를 꾸며내어 거짓으로 거짓을 전하여 마침내는 믿을 만한 문서가 되게 하니, 백세 뒤에 누가 진위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진 시황(秦始皇)이 열두 달 만에 태어났다고 써서 여씨(呂氏)의 아들이라고 지목하니, 이것은 유생(儒生)들을 묻어 죽인 것에 대한 원한을 보복한 것이다. 유안(劉安)은 반역죄를 지어 죽었는데도 정상적으로 죽었다고 썼으니, 선비들을 좋아한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부생(苻生)의 포학함은 역사책에 기록되었지만 어떤 이는 거짓이라고 여기고, 고병(高騈)이 여용지(呂用之)와 장린(張璘)에게 현혹된 것은 참으로 난리를 부르기에 충분하였지만 《요란지(妖亂志)》에서는 사실을 과장하였으니 수재(秀才) 나은(羅隱)이 고병에게 한을 품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 >송나라 태종(太宗)이 촛불 그림자에 꺼림칙해했다는 것은 결단코 거짓이다. 옥새를 담은 금궤(金櫃)가 앞에 있고 고명(顧命)이 옆에 있었으니 귀신이 죽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치이다. 다만 조정미(趙廷美)와 조덕소(趙德昭)의 죽음은 사람들 마음에 맞지 않아 야사(野史)에서 태종에게 악명(惡名)을 씌운 것이다. 심지어 알리불(斡離不)의 모습이 송나라 태조와 비슷하다는 것과 점한(粘罕)의 배에 도끼 자국이 있었다는 것으로 그 무고를 증거하여, 마치 송나라 태조가 송나라를 망친 자에게 원한을 보복한 것처럼 하였으니, 유자들의 붓놀림은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