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어 (문단 편집) ==== 한국 ==== > 청어는 정월에 입포(入浦)하여 해안을 따라 회유하면서 산란하는데 무수한 청어가 떼를 지어 군래하면 바다를 뒤덮는다. > ------ > - [[정약전]], 《[[자산어보]]》 中 동아시아에서 청어 어업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한국으로, 고려 시대부터 그 기록이 존재한다. 하지만 청어 어획량이 급증한 것은 조선 시대, 그 중에서도 소빙기의 영향으로 냉수괴가 황해까지 대대적으로 확장했던 근세이다. 냉수괴가 확장하자 한류성 어종이었던 청어 또한 서식지를 넓혀 중국 연안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청어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가장 인기 있는 [[등푸른 생선]]이었다. 수많은 등푸른 생선을 제치고 청어(靑魚)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바로 그 증거. 즉 옛 조선인들에게 등푸른 생선의 표준은 어디까지나 청어였던 것이다. 당시 청어는 전국의 바다 연안 전역에서 매우 많이 잡혀[* 기록에서 보면 청어 떼가 너무 많아 배가 나아가질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비유어(肥儒魚: 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 청어의 순우리말인 비웃을 음차한 것(또는 비유어가 비웃이 된 것)이다. 절인 청어는 자반비웃아라 한다.]로 불릴 정도로 값싸고 친숙하며 맛있는 생선이었다. 이때는 시기별로 각 지역에서 청어를 잡아 올릴 수 있었으며, 지금은 상상도 못하지만 [[황해도]] [[해주]]산 청어도 한때 이름을 날렸다. 해당 지역은 현재는 오히려 난류성 어종인 [[조기]] 어장으로 변했다. 특히 당시 소빙기의 영향으로 기근이 자주 발생할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었는데, 오히려 청어는 어획량이 폭증하면서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고, 배고픈 일반 민중의 배를 채워준 고마운 식품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조선에서도 청어를 보존하기 위해서 다양한 가공 방법들을 개발했다. 대부분은 타국의 청어 가공품과 아주 비슷했다. 대표적인 것은 관목이라 불린 [[과메기]]로, 바닷바람에 청어를 말린 것이다. 현재는 꽁치로 만들지만 원조는 청어였다. 한편, 부엌 굴뚝에 걸어 훈연한 [[훈제 청어]](연관목)도 있었다. 예로부터 청어죽은 보신재로 산후나 병후의 회복기에 좋은 식품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값도 싼 생선이라 어떤 선비는 "1냥에 청어 3뭇밖에 안 되는데 너무 비싸진 거 아니냐?"라고 하기도 했다. 참고로 1뭇은 10마리.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는 한술 더 떠서 "청어는 옛날에는 극히 흔하였는데 고려말에는 감산되어 쌀 한 되에 청어 40마리밖에 주지 않았다." 하고 한탄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은 병사들을 동원해 청어잡이로 수십만 마리를 잡아 군사와 피난민들의 식량으로 썼다고 한다. [[한산도]]에 [[둔전]]을 일구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곡식만 가지고는 그 많은 입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중엔 에너지 소모가 많아서 동물성단백질 섭취가 필수였을 테니, 이를 그나마 구하기 쉬운 생선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순신의 인품이 훌륭함을 어느 정도나마 확인할 수가 있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해산물을 포함한 지역 특산물의 경우 지방관이 중장에 뇌물로 바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 이순신은 뇌물로 바치기는커녕 군사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데 썼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의 인격에 감탄하게 된다.] 잡은 청어들은 주로 그냥 먹기보다는 말려서 [[과메기]]로 먹었다. 청어는 내장에 지방이 많고 살이 쉽게 물러서 금방 상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말린 청어를 농민들과 물물교환하여 군량미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순신 본인도 구운 청어를 즐겨 먹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생선이라서 조선 수군의 체력과 사기유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여담이지만, 청어와 함께 조선수군에 기여한 또 다른 수산물은 [[미역]]. 조선에서도 청어의 포획과 소비, 가공업은 비록 타 국가들처럼 전국적/국제적인 유통망을 갖춘 산업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활황이었다. 소빙기와 기근, 그리고 인구 증가와 화폐경제의 발전에 맞물려 삼면의 바다에서 대량으로 잡히기 시작한 청어는 조선 후기 어업과 유통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 조정의 수입 중에서도 청어 수산업에서 걷은 [[세금]]이 어느 정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주로 어살을 설치해 잡았다.[[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5906|#]] 한편 다산 [[정약용]]은 포항 유배 도중에 청어 어업에 적합한 그물을 만드는 법을 해당 지역의 어부들에게 알려 줌으로써 청어 어획량 증가에 기여했다. 원래는 어부들이 칡넝쿨로 만든 조악한 그물을 사용했기에 청어를 많이 잡아도 그물이 터지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정약용은 명주나 면사로 그물을 짜는 방법과 그렇게 만든 그물을 소나무 껍질을 달인 물에 담가 강도를 강화시키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이를 갈물 들인다고 하며, 이 방식으로 강화된 그물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정약용의 그물은 일제강점기에도 절찬리에 쓰이다가 나일론 그물이 등장하는 1950년대에야 사라졌다.[[https://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76636|#]] 하지만 한국 근해의 청어들도 어획량 변화가 걷잡을 수 없이 큰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이후 청어의 이동이 시작되면서 청어 산업은 쇠퇴하고 만다. 소빙기가 끝나면서 우선 중국 연안의 청어들이 사라졌고, 한반도 서해안의 청어는 19세기부터 서서히 개체수가 감소하다 자취를 감췄다. 19세기 말에 들어서는 청어 서식지가 아예 인구 희박 지역인데다 높은 산맥으로 타 지역과 고립되어 있는 동해안으로 국한되었다. 이 덕에 인구 밀집 지역인 서부 지역과 생산지가 괴리되면서 생산량도 덩달아 급감했고, 자연스럽게 청어 어업도 다른 어종에 밀려 사양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 빈 자리를 꿰찬 것은 난류성 어종이라 서해안에서 원래 많이 잡히고 소비되는 [[조기]], 그리고 삼면에서 잘 잡히는 [[고등어]]였다.[* 다만 한국 내 고등어의 주 생산지는 동해와 남해다. 서해로 올라오는 건 가을 한 철.] 한류성 어종인 [[명태]]나 [[대구(어류)]], 청어는 교통 및 냉장 기술이 발전한 근대에 들어서야 소비량이 다시 폭증한다. 이 때문에 조선 청어 어장은 19세기부터 국제적인 각축장이 되기도 했다. 18 ~ 19세기경 중국 연안까지 잠시 확장했던 청어 집단이 다시 조선 서해안 연안으로 돌아가자, 이를 쫒아 [[청나라]] 어선들이 조선 연안까지 와서 조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황당선]]이라고 불렸던 선단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중국 어선의 불법 어로 행위 중 가장 이른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 조정과 청나라 조정 간의 외교 문제로까지 잠시 번졌을 정도였다. 19세기부터는 일본의 청어 어업이 개항 및 산업화와 맞물려 더더욱 활황을 띔에 따라 일본 선단이 조선 어장에 침투했다. 당대 일본은 서구 국가들에 비누 및 각종 기계유의 원료인 청어 어유를 수출하였는데, 홋카이도까지 병합해서 그 근해 어군을 싹 잡아들인 결과 청어 개체수가 격감한 것이다. 그러자 일본 어선단은 점차 일본 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어업권을 야금야금 갉아먹었고, 경술국치 이후 조선이 식민지가 되자 거리낌 없이 조선 동해안의 풍부한 청어 어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한편 서식지가 축소되었음에도, 19세기 말까지는 어획량이 엄청나 부산항에 배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청어가 몰려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60년대부터 차차 줄어들어 7~80년대에는 1/100수준이 되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원래 제철이어야 하는 연초 때의 어획량이 아예 0이었다는 기록도 있었으나, 90년대들어 차차 늘고 있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수십 년간 청어가 거의 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자산어보]]에도 이런 청어의 주기적인 이동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55년 주기로 서해에서 청어가 잡히다가 동해에서 잡히다가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한국에서 청어가 씨가 마르면서 청어로 만드는 [[과메기]]는 거의 사라지고 꽁치 과메기밖에 남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청어 회유로가 40년이 지날 때마다 바뀐다는 설이 있으므로, 다시 연근해가 청어 떼로 넘칠 날이 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맛의 달인]]에서는 청어-[[고등어]]-[[꽁치]]-[[정어리]] 순으로 순환이 일어난다는 설을 제시했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로 국내에서 청어 어획량이 다시 늘어나고 청어 풍년인 해도 점점 늘어나는 중. 당연히 청어 과메기도 부활했다. 대한민국에서 잡히는 청어는 주로 양식장의 사료로 이용된다. 청어를 직접 식용으로 판매하기보다 청어로 넙치 같은 양식어종을 길러서 판매하기가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주요 가공품은 다음과 같다. * '''[[과메기]]''' 청어를 막대기에 꿰어 겨울 바닷바람에 말린 [[건어물]]. 눈을 꿰었다 해서 관목(貫目)이라고도 한다. 이 한자어가 과메기라는 말의 원조인지, 아니면 단순히 과메기란 단어를 한자로 음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공식적으로는 관목의 방언이 과메기라는 것이다. 현대 들어 청어의 개체수 감소로 인해 대체재인 [[꽁치]]로 주로 만들었지만, 청어 어획량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원조 청어 과메기도 다시 늘어나고 있다. 내장을 제거하지 않은 채 말린 것은 요새는 통과메기라고 부르는데 이쪽이 사실 원조다. 현재 유통되는 과메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내장을 제거하고 반으로 가른 편과메기는 사실 1990년대 대량공급을 위해 새로 개발된 신식 기법이다. 포항 수협의 설명에 따르면 전통적으로는 부엌의 살창에 통째로 걸어 겨울 바람에 말리는 냉훈법으로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부엌에서 나오는 연기가 자연적으로 청어를 훈연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별도로 연기 연(煙) 자를 앞에 붙여 연관목이라고도 불렀다. 연관목은 현재는 거의 완전히 사라져서 기록에서나 볼 수 있다. 본래 과메기는 동해안 전역에서 소비하는 보존식품이었지만 [[포항시]] 영일만의 청어로 만든 과메기가 특히 유명하다. * '''청어 알젓'''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와 전라북도 [[부안군]] 곰소 일대의 토속 특산물. 말 그대로 청어알을 절여 만드는 젓갈이다. 갖은양념과 소금, 그리고 청어알을 켜켜이 쌓아 만든다. * '''청어 [[식해]]''' 강원특별자치도, 함경도, 경상도 지역의 향토 음식. 말려서 썬 청어와 무, 마늘, 생강 등을 찹쌀과 함께 장독에서 삭혀 만든다. 일반적으로는 편[[과메기]]를 손질하여 만드는 경우가 많다. * '''청어 절임''' 유럽의 청어절임과 유사한 강원특별자치도, 함경도 지역의 향토 음식. 현재는 기록으로만 남은, 사라진 식문화이다. 청어 100마리에 소금 2되를 잘 말린 장독에 넣어 절여 만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