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로키족 (문단 편집) === 수난 === 그러나 그런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1835년 미국 연방 대법원이 "체로키족은 사법 대상이 아니다."라면서 [[미시시피]] 강 동쪽으로 확장하려는 [[조지아 주]]에 부정적인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앤드루 잭슨]] 대통령에 의해서 [[까라면 까|파괴 작업이 강행되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체로키족이 거주하고 있던 곳과 근접한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산간지역 스카치 아이리시 개척민 집안 출신인데 체로키족을 쫓아내고 개척지를 확대하길 원하던 당시 [[애팔래치아 산맥]] 일대의 스카치 아이리시 이주민 집단과 같은 감성을 공유했기 때문에 이러한 짓을 저질렀다.] 결국 오클라호마 주로의 강제 이주 과정(1838년 가을~ 1839년 봄의 "눈물의 길")에서 모든 근거지를 잃고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다. 이 당시에 극소수로 체로키족들과 사이좋게 지내던 백인이 바로 《[[즐거운 나의 집]]》 작사자로 유명한 극작가 존 하워드 페인이 있다. 미 의회에 잭슨에 대한 [[탄핵]]안까지 청원하며 잭슨을 비난하고 강제 이주를 막으려 했으나 끝내 막지 못했다. 조국에 대하여 실망한 페인은 미국을 떠나 살아 생전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죽어서야 시체나마 나중에라도 조국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겨 30년 넘게 지나서야 시신은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남북전쟁]] 뒤인 1866년 미국 중앙정부와 체로키족이 맺은 협약에 따라 체로키의 흑인 노예가 해방됐다. 해방 흑인 외에 당시 체로키족과 결혼해서 살던 자유 흑인도 있었다. 모두 합해 대략 1천 명쯤 됐다고 한다. 이들은 그후 대부분 준자치정부인 체로키민국(Cherokee Nation)의 일원으로 살아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