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첸쉐썬 (문단 편집) === 중국 귀국 === 한국 전쟁이 휴전된 뒤 [[제네바 협정|1954년 4월 제네바에서 열린 19개국 대표자 회의]]에서 중국은 기자간담회를 자청, 미국 내에 있는 유학생 등 중국인들을 미국이 강제로 억류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중국 송환을 요구했다. 지도 교수였던 카르만은 사과 상자 밑에 첸쉐썬 아버지의 절친인 천수퉁(陳叔統)이 마오쩌둥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린 중국 잡지 사진을 깔개로 넣어 보냈다. 이 사진을 통해 첸쉐썬은 아버지 친구가 지금 중공에서 높으신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첸쉐썬은 천수퉁에게 직접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 결국 지리한 협상 끝에 1955년 8월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첸쉐썬을 포함한 중국 과학자들을 미군 포로와 교환하는 합의안을 승인했다. 당시 첸쉐썬과 함께 돌아온 중국인 석박사급 과학자들은 200여 명 정도였다. 미국에서는 과학자들을 적국에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미군 포로 한 명의 생명이 훨씬 중요했던 미국 수뇌부는 첸쉐썬을 포함한 과학자들과 포로를 교환하는데 합의했다. 게다가 미국측은 이들 중국인 학자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첸박사 및 다른 과학자들은 몇년간 최신 연구에 참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지식은 시대에 뒤진 것이고, 돌아가봤자 별 도움이 안될 것이다"라고 평가한 보고서가 많았다. 출국 금지가 해제되자 첸쉐썬은 즉시 Caltech에 종신교수직 사직서를 냈다. 9월 그는 가족과 함께 여객선 SS 프레지던트 클리블랜드호를 타고 LA에서 홍콩으로 출발했다. 첸쉐썬은 출발 전 만난 미국 기자에게 '''"나는 돌아올 계획이 없습니다. 나는 중국 인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데 최선을 다해 협조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한다.[* 《 인민일보해외판 》 2010년 1월 6일 제 07 판] 첸쉐썬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간 약 200명의 과학자들은 중국 과학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밑바탕이 되었고, 수십년 후 미국에 뼈아픈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만 10여년 후 발생한 [[문화대혁명]] 때 이들 중 상당수가 반동분자로 몰려 고초를 겪었고 일부는 홍위병의 박해로 사망하거나 자살하기도 했다. 첸쉐썬 박사는 교묘한 처신으로 피해갔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