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첸쉐썬 (문단 편집) == 평가 == 좋게 보자면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연구와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공학자지만, 독재 정권에서 살아남기 위해 쏟아낸 짓들을 보면 나쁜 평가도 전혀 틀리지 않다. 하지만 [[대약진 운동]] 역시 중국인을 위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보면 그가 '''애국자'''였음은 인정받는 편이다. 대약진 운동 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인권탄압과 독재에 침묵하고 동조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으나, 중국 과학기술 발전의 기틀을 다졌던 중국 과학의 영웅이라는 평가 역시 온당하다. [[마오쩌둥]]에 대한 [[덩샤오핑]]의 '''공7과3'''이라는 평가는 그에게도 유효할 것이다. 중국사의 파란만장한 기간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태평하고 무사히 지냈으니, 학문적 능력뿐만 아니라 [[가후|처세술도 발군]].[* 물론 뒤집어서 말하자면 그가 줏대없는 기회주의자라는 이야기도 된다. 하지만 어쨌든 그 시절에 전혀 핍박을 안 당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긴 하다. 아마 미국에서 [[매카시즘]] 관련된 고초를 겪으면서 여러가지로 배운 게 많았던 듯하다.] 반우파운동, [[문화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의 그 험악한 세월에서도 미국에서 20년간 머물렀기 때문에 반동분자로 몰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으나[* 첸쉐썬 박사와 비슷하게 해외유학의 배경을 갖은 많은 과학자들은 국가적 과업을 수행했음에도 수없이 감방에 끌려가거나 홍위병의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첸쉐썬 박사와 더불어 3첸으로 불리는 과학자가 첸웨이창(錢偉昌, 전위창) 박사와 첸싼창(錢三強, 전삼강) 박사가 있다. 첸웨이창 박사는 Caltech 시절 첸쉐썬 박사의 동료였으나, 백화제방 백가쟁명 시절 공산당 독재를 비판했다가, 시골로 여러번 끌려가 삽질을 했다.], 단 한번도 수용소나 감옥에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양지에서만 머무르는 경이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것은 그가 상당히 국가적 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베이징 소재 호화주택을 배정받았으나, 1960-70년대 내내 [[주취안 위성발사센터|내몽골의 사막]]에 머무르며 중국의 미사일 개발을 지휘했다.] 유일하게 위기에 처했을 때가 [[4인방]]을 지지하다가 [[덩샤오핑]]이 집권했을 때 미사일 조직의 실세에서 밀려났던 일이다. 하지만 몇년 지난후 덩샤오핑의 [[천안문 6.4 항쟁]] 진압을 적극 지지하고, 상하이교통대학 후배 [[장쩌민]]이 집권하자 다시 위상을 되찾았다. 이 때문에 민주화 운동가들은 그를 "과학자라기보다는 정치인"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정작 '''[[메카시즘|그를 미국에서 내쫓아 중국에 도움을 주게 한 것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