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총력전 (문단 편집) === 달라진 전쟁 양상 === 위의 요소들이 결합하면서 전쟁은 길어지고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전근대에도 전쟁이 몇 년 단위로 장기화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지만 실제로 이런 경우엔 교전 빈도 자체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애초에 인력과 물자의 동원 및 생산력이 미약하던 시절이라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러다 보니 대규모 [[회전]]에서 크게 패하면 당시엔 이 손실을 회복하는데 한참 걸리는 관계[* 우선 전투의 승패가 국가 지도부에 전달되는 속도부터가 매우 느렸고 이를 인지해도 당시 생산력과 통신, 행정력으론 인력을 동원하고, 필요한 무기를 생산하고 보급하고, 훈련까지 끝마친 후 최종적으로 전방으로 병력들을 이동시키는 데엔 그야말로 한세월이었다. 당연히 그 사이에 적군이 가만히 앉아있을 리가 없다.]로 그대로 전쟁도 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근현대의 관료제, 국민개병제, 철도, 산업혁명은 전근대 시대와 비교도 안 되는 동원 및 생산력을 부여해줬다. 이러다 보니 대규모 [[회전]]에서 패해서 수십만의 인력과 수천 대의 중장비를 상실하고도 인력과 물자를 금새 보충해버리기 일쑤였고 결국 승전을 위해선 상대국의 인력, 물자, 산업력 등의 역량 자체가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계속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슐리펜 계획]]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승부를 내려던 독일군의 시도가 [[마른 전투]]에서 좌절된 뒤 [[참호전]]의 양상으로 전선이 고착했고, 몇 주면 끝나리라 예상한 전쟁이 몇 년을 끌게 되었다. 문제는 각국이 채택한 프로이센의 징병제는 전시에 군대의 규모가 '''평상시에는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팽창한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2차대전의 미국 육군(육군항공대 포함)은 1939년 9월, 2차대전 개전 시점에서 18만 명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1945년 시점에선 800만 명이 넘는 규모로 급팽창했다. 병력 증가수치를 퍼센트로 환산하면 6년 동안 4450%가 증가한 것이다.[* 다만 이건 평시 미군이 적었다는 측면도 있다. 인구가 약 2천만이던 6.25 이전 대한민국 국군이 10만 명 수준이었다.] 프로이센의 징병제는 전쟁이 빨리 끝나면 대단히 효율적인 방식이고, 나폴레옹 전쟁[* 나폴레옹 전쟁 전체 기간은 길었지만,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난 개개의 전쟁 자체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과 보불전쟁에서 그 효과를 입증했다. 그러나 전쟁이 수 년 단위로 길어지자 이대로 군대를 유지하기는 어려운데, 그렇다고 상대방도 징병제로 대군을 동원한 상황에서 병력 규모를 축소할 수도 없는 상황에 몰렸다.[* 질적 우위로 무작정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게, 미군도 껍데기만 남은 이라크군 37만을 밟기 위해 30만 대군을 동원했고, 그 중에 지상군만 해도 절반에 가까웠다. 그나마도 이라크군이 수만 명의 공화국 수비대 정도를 제외하면 제대로 싸우지 않을 거라는 전제를 깔고도 이 정도를 동원한 것이다. 탈레반을 상대할 때도 미군은 10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는데, 아프간 정부군 제외하고 미군만으로도 탈레반과 비교해 병력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많았다. 대군에는 전략도 필요 없다는 나폴레옹의 격언은 시대를 초월해서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칙이라는 걸 상기하자.] 전쟁에서 소모하는 물자의 양 역시 급격히 늘어났다. 전투가 회전 양상일 때는 포격도 길어야 몇 시간 정도였다. 여기서 적이 무너지면 그걸로 게임 끝. 그러나 참호전이 시작되면서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으로 고착된 전선에서 아군의 생존률은 확실히 높아졌지만 적군을 제압하기도 훨씬 어려워졌다. 이 상황에서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몇 달에서 몇 년씩 계속해서 포탄과 총알을 쏟아부어야 했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수준의 탄약을 소모하기 시작했다.[* 1차대전의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1일(or 1개월) 포병용 탄약 소모량 예측을 2만 발로 계산했고 준비했지만 실제로는 20만 발씩 서로에게 발사했다고 하며 주요 공세의 준비에는 공세에 필요했던 탄약의 수송을 위해 항상 [[화차(철도)|화차]] 수천량의 편성이 요구되었다고 한다.] 또한 대포나 전함 등의 무기들도 갈수록 거대하고 복잡해져서 더 높은 수준의 산업적 능력을 요구했다. 당장 19세기 후반에만 해도 대포는 직사포 위주에 포탄도 후장식이 이제 막 보급되고 75밀리 같은 소구경포가 일반적인 단계였지만 1차대전 때 이미 현재 사용하는 105mm 포 정도는 일반적인 무기체계가 되었고 독일군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대구경 곡사포를 개발해야 했다. 물론 이게 다 돈인 만큼 결국 프랑스, 독일 등 전쟁 각국은 국가경제 자체를 전쟁에 총투입해야만 했다. 즉 국가경제의 구조 자체가 전쟁 위주로 재편되어버린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