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총력전 (문단 편집) === [[국민개병제]]의 등장 === 근대 이후 유럽에서 전쟁의 양상은 큰 변화를 겪는데, 바로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 [[징병제]]를 실시해서 군대의 규모를 폭발적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는 국가가 더 이상 왕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으로 바뀌었으며, 이에 따라 전쟁이 왕의 전쟁이 아니라 국민의 전쟁이 되었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국민군이 나타났고,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보급하고 무기를 쥐어주며 훈련시키는 일 또한 중대한 산업적 과제가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 후반에 [[프로이센 왕국]]에서 마침내 징병과 예비군을 결합하는 본격적인 징병제를 실시했다. 여기에도 3가지 요인이 있는데, 첫 번째는 프로이센 군대가 당시 유럽 최강으로 꼽히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을 [[보불전쟁]]에서 격파한 이후로 영국[* 영국은 과거 수백 년 동안 특유의 유서깊은 모병제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것은 흔히 레드코트로 인식되는 소수정예 군대체제로서, 압도적인 해양전력을 바탕으로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프랑스가 국민개병제를 전면적으로 실행하면서, 전쟁 중반부터는 대 프랑스 동맹의 여러 왕정국가들도 이를 모방하여 비슷하게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영국은 모병제의 허점을 이용해 반강제 징집을 하였을 뿐, 공식적으론 징병제를 도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1차대전이 시작되자, 폭발적으로 증가한 유례없는 병력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1916년부터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종전후엔 다시 폐지되었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재도입되었다. 이는 1960년대까지 유지되다, 결과적으론 모병제로 회귀하였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프로이센의 징병제를 일종의 모범 사례로 여겼다는 점이다. 그 결과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군대의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고, 이러한 군대를 무장시키며 먹이고 입히며 재우고 치료하며 매장하는 일 또한 산업적인 과업이 되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 두 국가 모두 징병제를 운용했지만, 타이틀만 징병제로 같을 뿐 실상은 큰 차이가 있었다. 프랑스는 문자 그대로 성인 남성을 국가의 힘으로 붙잡아 전쟁터에 내보내기 위한 징병제를 운용했다. 하지만 징병제에서 성인 남자 전원이 징집 대상이라고 해도 정말로 전원을 군대에 보내면 사회를 유지할 수 없고 그만한 규모의 군대를 감당할 수도 없으므로, 실제로 군대에 있는 인원은 징집 대상 중 소수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데파르트망, 즉 징집 대상 지역의 대상 남성들이 제비뽑기를 해서 정해진 숫자만큼 뽑힌 사람이 군대에 가고 일정한 기간마다 제비뽑기를 해서 교대하는 방식의 징병제를 운용했다. 웃긴 건 합법적인 병역기피가 가능했다는 건데 [[대한민국 국군]]에서 갖가지 방법으로 병역을 회피하는 상류층들이 프랑스군에서는 그냥 돈 주고 다른 사람 보내서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상류층이 저 모양이니 중산층들도 당연히 같은 짓을 했고, 결국 프랑스군은 사회낙오자와 빈민층들의 군대가 되어 버렸지만 역설적으로 장기복무를 하면서 군사훈련을 수시로 받다 보니 병력과 전투력은 유지가 됐다.[* 이는 조선의 [[대립군]](代立軍)이나 현대 미군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미국 장군이 "모병제 군대는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고 발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목숨보다 월급이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경제적으로 열악한 계층이 군인의 다수가 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반면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비하면 인구가 많이 적었기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 소수의 인원만으로 군대를 충원하면 병력의 숫자가 너무 적고, 그렇다고 다수를 징집하면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으므로 예비군을 두었다. 즉 프로이센식 징병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 말고도 다수의 예비군을 훈련시키는 것 또한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평상시에는 프랑스식으로 가되 인구 규모에 맞춰서 적은 규모의 병력을 보유했으나 전쟁이 발발할 시 짧은 기간 동안 전면징집제를 실시하여 그렇게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빠진 상류층, 중산층들을 모조리 군대로 끌어다 배치하여 대규모 병력을 운용했다. 물론 장기복무를 하는 프랑스군에 비교할 때 숙련도는 확실히 떨어지지만,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장교단을 최대한 우수한 수준으로 운용했고[* 다만 장교단의 규모는 한계가 명백하기 때문에 당대 유럽의 군대는 [[소대장]] 정도는 부사관이 맡는 식으로 가는 게 보통이었다. 중대장급 이상만 장교를 배정했다.] 또한 사회낙오자들로 구성된 프랑스군에 비해 질적 수준도 높았으므로 바보짓만 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의 열세나 전사상자로 인한 부대 사기 저하를 감당할 수 있었다.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그리 쉽게 무너진 것도 숙련도만 높지 전선에서 밀리면 사회낙오자들로 구성되어 전의가 떨어지는 군대가 그냥 패주해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