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동민 (문단 편집) ===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과 군 복무 === 1988년, [[서울시립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사법시험에 도전할 계획이었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88년 5월 15일 서울대학교 [[조성만]] 열사[* 조성만 열사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최동민의 고향인 부안 바로 옆 동네 출신이다.]가 사회운동을 하다가 투신했다는 자보가 학교를 뒤덮었고, 대자보와 조성만 열사의 유서를 읽은 최동민은 부끄러움을 느껴 이틀 후인 5월 17일 총학생회가 마련한 버스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5.18 민주화운동|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비디오를 시청하며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와 사회개혁에 대한 의지를 키웠다. 학생회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89년 [[이철규 의문사 사건]][* 나무위키 링크를 위해 ‘이철규 의문사 사건’ 적었으나, 이 사건은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으로 외부의 힘에 의해 큰 상처를 입고 물에 던져져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당시 군사정부가 반독재투쟁에 앞장서던 이철규를 구타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의혹으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사인 규명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광주교도소에서 5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수감생활 중 과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서울시립대학교 법학과 학생회장으로 활동했고, 1991년 총학생회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총장직선제로 선출된 [[고건]] 전 서울시장을 노태우 정부가 승인 거부하자, 교수 및 교직원과 연대하여 외압 거부 운동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고건 전 총리가 자진 사퇴하며 사태는 종결되었다.] [[파일:최동민_학생운동.jpg|width=300]] 1991년, 명지대학교에 다니던 [[강경대]] 열사가 학원 자유화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에 참석하다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머리를 다쳐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전국 각지에서 강경대 열사의 구타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고, 최동민은 서울시립대 총학생회장으로 강경대 열사 장례위원으로 참여해 경찰의 수배대상이 되었다. 1991년 11월 26일, 동대문역에서 5명의 사복 경찰들에게 검거되어 구타 등 고문을 겪었다.[* 고문을 당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겁이 난다고 주저앉아만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을 되새겼다고 한다.] 성동구치소에서 1년간 수감생활을 했는데, 이 때, 지금의 아내에게 편지를 받으며 큰 힘을 얻고 이후 연인이자 아내로 발전했다고 한다.[* 구치소에 수감중인 최동민을 위해 학생운동을 함께 하던 지금의 아내가 학교 풍경을 바뀌는 계절마다 그려서 보내왔다고 한다. 낭만적인 이야기다.] 당시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은 아버지와 아버지와 그 사이를 오가며 고생한 어머니에게 아직까지 죄송함을 가지고 있다고 책에서 적기도 했다. 성동구치소에서 출소 한 다음날 바로 군대에 강제 징집되었다. 당시는 시위전력이 있는 사람을 의가사 제대로 1년가량 일찍 내보내는 경향이 있었는데, 최동민은 이를 거부하고 육군 [[8사단]]에서 2년간의 군복무를 모두 마치고 병장으로 만기전역 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것과 군 복무를 하는 것이 똑같이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