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영 (문단 편집) === 요동 정벌 === 중국에서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가고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고려와 명나라는 외교적 분쟁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왕 14년, 명에서 귀국한 설장수가 명나라 황제의 성지를 전한다. 그 내용인즉 "철령 이북 지역을 모두 명나라 땅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라는 명령. 북변과 그 일대에 거주하는 고려인, 한인, 여진 등 모든 백성까지도 요동에 귀속시키겠다고 통보를 내린 것이다. 철령위 문제로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다. 안 그래도 우왕 기간에 명나라는 기싸움에서 고려를 제압하려고 미친 갑질을 하는 중이었다. 왜구로 탈탈 털린 고려에 명나라가 너무 과도한 공물 요구를 해서 조정과 백성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진 터였다. 더구나 공민왕의 사망에 간접적으로 일조한 목호의 난도[* 최영이 난을 진압하려고 개경을 떠난 터라 공민왕을 지키지 못 했다.] 명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말을 징발하다가 시작된 일이었다. 고려의 북쪽 영토를 송두리째 빼앗아가겠다는 명의 주장에 고려와 명나라는 영토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이에 반발한 최영은 우왕에게 대대적인 요동 정벌을 진언했고, 결국 팔도도통사의 자격으로 원정을 총지휘했다. 약 5만 정도의 병사와 2만필의 말이 동원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2차 요동 정벌'[* [[제1차 요동 정벌]]은 [[공민왕]] 때 이루어졌으며, 이 당시의 최영은 [[신돈]]에 의해 좌천된 상황이었기에 요동 정벌에 참전하지 못했다. 참고로 1차 요동 정벌에 종군한 장수 중 한명이 바로 이성계였고 사령관은 이인임이었다.]이다. 생전 공민왕의 북벌은 쌍성총관부를 포함해 동북면과 서북면을 건너 요동까지 이른 바 있었다. 최영과 선대부터 내려온 강경파 무신들은 요동 정벌을 강력하게 원했다. 그러나 최영의 요동정벌의 성공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북변의 사정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때 이성계가 '''사불가론'''을 들어 반대한 것이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졌기에 불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요동정벌에 성공한다치더라도 더 큰 문제는 과연 유지가 가능한가이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정벌에는 성공하였을 것이나 방어하느라 뼛골이 다 빠지고 쇠락했을걸?"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고려에 최영과 이성계라는 걸출한 무장이 있었고 한반도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다수의 전쟁을 치르던 시절이었기에 병사들과 장군들의 실전 경험도 풍부해졌다. 그렇지만 당시 고려는 간신히 여러 전란에서 벗어난 상황이었고[* 물론 몇년 후인 공양왕 대의 전답 등록수가 조선 후기보다도 많아 경제적으로는 어느정도 나아진 것이 사실이나 왜구의 노략 등 군사적 방비에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아 대규모로 군사력을 동원하면 무리가 올 상황이기는 했다.] 또한 바로 이 해(1388년)에 명나라를 괴롭히던 요동의 군벌 나하추가 20만 병력을 이끌고 명에 항복해 요동의 군벌 세력으로 버티는 중이어서 뚫기 만만한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 [[북원]]도 명나라 장군 남옥이 이끄는 15만 병력에 박살나는 바람에 크게 쇠약해져 있었고, 애초에 이 영토분쟁도 명나라 역시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순히 병력 규모로만 봐도 명의 방어 병력이 고려군의 3배에 달했기에, 고려군이 아무리 백전의 정예군이었어도 상당히 고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고려사에 기재된 병력 5만은 1명 단위까지 정확히 기재된 실 병력수이고, 중앙 정예군의 수로만 센 것이며, 당시의 전쟁에서는 가는 길에 병사를 징발해가며 이동하였기 때문에 다소 높게 쳐야 하기는 한다.[* 당시에는 호왈로 10만이라 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3LvxBgAAQBAJ&pg=PT38&lpg=PT38&dq=%EC%9A%94%EB%8F%99%EC%A0%95%EB%B2%8C+10%EB%A7%8C&source=bl&ots=97Cq1KeGV2&sig=g7Oce1zvV54iauk5hnBXr8SOxZM&hl=ko&sa=X&ved=0ahUKEwjLtr7Ex-_NAhVGGpQKHeizCeoQ6AEIUTAI#v=onepage&q=%EC%9A%94%EB%8F%99%EC%A0%95%EB%B2%8C%2010%EB%A7%8C&f=false|#]]] 또한 당시 동아시아에서 [[호왈백만|호왈이 일반적인 관습]]인 걸 감안하면 명군과 나하추의 15만, 20만의 수치 또한 실병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이유 역시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초원으로 쫓겨간 몽골군은 당시에도 최강의 부대들로 영락제는 이들을 조기에 제압하겠다고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나서서 정벌을 벌여야 했다. 또한 나하추의 병력은 숫자는 확실히 많은 편이지만 명나라가 이들을 확실히 자신들 병력으로 여겼을지도 알 수 없다. 나하추의 병력은 원말 혼란기에 나하추가 가진 사병집단으로, 원나라가 쫓겨가고, 명나라의 위협에 나하추의 투항에 귀속된 것 뿐이었다. (그리고 나하추의 병력은 몇 차례 고려를 공격해 왔음에도 패배하고 돌아갔다. 고려군으로서는 요동정벌에서 1차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병력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없었다.) 또한 당시 요동 상황에서 명나라는 요동의 반도 끝을 시작으로 북상해 가면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만약 요하 일대의 고려인 거주 집단(심양일대)들에 도움을 받아서 요하일대의 주요지역들을 점거하고, 나하추의 병력이 요하를 건너는 것을 저지시켜, 북상한 고려군 주력으로 격멸시킨다면 명군은 요동으로 들어 오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요동반도는 대규모 병력이 상륙하여 이동할 여건이 좋은 편이 아니고, 초원의 몽골군이 장성과 요하 사이에 육상 이동로를 그때까지는 작전권 아래에 두고 있었다, '''다만''' 명군이 요동으로 가지 않고, 산동에서 장산곶으로 직공하여 개경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위험성은 존재한다.)] 최영은 원래 후배 무장인 이성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그를 신뢰하고 있었는데 사불가론을 내세우는 이성계와 정면으로 충돌한 계기로 관계가 상했다.[* 사실 이성계도 반대하다가 타협할 생각으로 "지금(여름)은 시기가 나쁘니 가을로 잡자."고 권유했지만 무시됐다.] 최영은 상대적으로 적은 병사로 실력을 보이려면 속도전이 답이라고 생각했으며 시기를 미루자는 주장은 시간을 끈 다음 정벌 무산을 노리는 의도로 해석하여 반대파를 처형하면서까지 요동 공격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런데 최영은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한 출정을 강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출정하지 않고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는 이율배반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는 팔도도통사로서 최영 본인이 직접 출정해 군사를 지휘하려는 것을 우왕이 나서서 극구 말렸기 때문이다. "선왕이 시해당한 것은 경이 남쪽(탐라)을 정벌하느라 개경을 비워서 선왕 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인데, 이제 경이 북쪽으로 가버리면 내 옆은 누가 지켜주느냐?!"고 땡깡을 피운 것이다. 이는 목호의 난 당시의 사태가 우왕에게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이다. 최영의 출전이 밀리면서 군사의 지휘권은 이성계와 조민수의 손에 들어갔고 이것이 최영의 결정적인 패착이 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