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영 (문단 편집) === 긍정적 평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001/2008/03/17/kp1_080317070600.jpg|width=100%]]}}} || || {{{#000000 북한에서 발행한 최영 우표.[* 고려 우표가 아닌데, 그 이유는 북한이 자신들을 칭할 때 대한민국이 한국이라고 부르듯이 '공화국' 혹은 '조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 ||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라는 말이 최영이 한 말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사실 이것은 최영의 부친이 사망하면서 최영에게 남긴 말이다. 최영은 이 말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살았고, 이를 통해 저 말은 유명해졌다. 《[[고려사]]》에서도 최영을 청렴강직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평가는 박한 편이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불학무술(不學無術)"'''이라는 악평도 남겼다. 우직한 반면 학술이 없고 편협했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사는 최영의 전장에서의 활약도 깎아내려 단순무식한 무장으로 몰아가는 면이 있다. 하지만 최영은 [[명장]]이었다. 전투에 임할 시에 작전 수립과 정보 수집을 치밀하게 하고 복병이나 기습책도 자유롭게 구사했다. 대표적 전투인 [[홍산대첩]] 때의 과감한 돌격은 왜구의 수가 많지 않았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감행한 것이었다. 단순무식한 [[맹장]]이 아니라 전술적 사고를 겸비한 [[명장]]이었다는 소리. 멍청한데 만용만 있었다면 금방 죽어버리기 십상인데 최영은 수십년을 전장에서 살아남으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저런 폄하는 왕조 개창 이후 전 왕조의 버팀목이었던 최영을 깎아내리기 위한 서술일 가능성이 있다. 최영은 [[위화도 회군]]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로, [[조선]] 개국의 직접적 단초가 되었던 최영을 너무 높이 평가할 경우 조선 개국의 명분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무력의 측면에서도 당대 최고 수준을 자랑할 정도의 실력을 가져, [[홍산대첩]]에서는 무려 60세 나이에도 입술에 박힌 화살을 뽑으면서까지 선봉에 서서 왜군을 박살내는 용력을 보여주었다. [[후삼국시대]]에 [[유금필]]이 있었고, [[여요전쟁|거란의 침공]] 때 [[양규]]가 있었고, [[여진 정벌]] 때 [[척준경]]이 있었다면 [[여말선초|고려 말]]에는 최영이 있었다. 육상에서의 [[야전#s-1|야전 지휘관]]으로서는 손에 꼽을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당대 최고 수준의 전술적 능력과는 달리 대전략적으로는 그리 현명하지 못 했다. [[명나라]]를 향해 전면적인 전쟁을 벌인다는 최영의 선택은 일이 잘못되면 명나라 수십만 대군의 침공을 야기시킬 수 있는, 국가적으로 너무나도 위험한 판단이었기에 식견이 모자라다는 악평은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게다가 [[재상]]의 자리에 올라 [[군인]]이 아닌 [[정치가]]가 되었음에도 융통성 없이 엄격하게 처리하는 것만을 선호했는데 이 또한 정치인으로써는 현명하다고 말하기 힘든 부분이다. 고려 말에 국가가 부패하고 기강이 해이해져서 정치에도 다소 엄격함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그가 재상으로써 임한 부분들을 보면 명백하게 과한 조치가 많다. 그가 장수로써 세운 많은 군공이 기록 삭제를 당한 것도 아니고 남아있음에도 불학무술이라는 악평을 들을 만한 부분이 그에게는 분명히 존재한다. 최영은 정치 군인이었던 [[태조(조선)|이성계]]와 달리[* 드라마 등에서는 이성계가 순수한 군인상으로 미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이성계는 이미 회군 이전에도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사대부 세력과 상당한 인맥을 쌓고 있었다.] 순수한 군인에 가까운 인물이라[* 이성계와는 달리 최영은 본인 파벌을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듯한데,《[[고려사]]》에는 "최영은 평생을 군문에 종사했지만 아는 얼굴이 두서넛 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을 정도다.] [[정치]]를 함에 있어선 거침이 없고 철저한 [[상명하복]]으로 움직이는 군대의 속성을 그대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일단 일을 시작하면 주변 사람이 아무리 말려도 시행하여 소용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지윤]] 제거 때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한번 작정하면 [[이인임]]도 못 말렸다. [[요동 정벌]]을 추진함에 있어 많은 반대를 모두 무시한 채 군사를 일으키고, 정벌에 반대하던 이성계를 기어이 혼자 보내고 퇴각 불가 방침을 내렸다. 당연히 부하와 백성들에게도 엄격했다. 웬만한 장수들은 군령을 어기면 목이 달아났고, [[공민왕]] 때 6도의 군사를 다스리며 대대적으로 배를 만들고 고려 최초의 대량 수군을 양성하는 만드는 과정에서 70세 이상 된 자에게도 등급에 따라 곡식을 징발하는 바람에 집을 부수고 도망가는 백성이 50~60%에 이르렀으며 원성이 많았던 일도 있었다. 다만 최영은 이 수군을 만들어 왜구를 방어하고 나서야 백성들이 도륙당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며 물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이런 엄격함은 그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고 사욕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국가의 [[수호신]]으로 존경해 마지않았다. 실제로 최영은 휘하의 군인이 죄를 지으면 군법을 엄격하게 지켜 참수한 다음 효수하거나 팔을 잘라 [[조리돌림]]하기도 했으며, 최영의 조카 사위가 살인죄를 지었을 때 그의 인척임을 감안해 죄를 경감해 주려고 하자 법대로 하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최영의 엄격함에 대한 악평은 주로 [[공민왕]]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도 당시의 시대 상황을 분명히 인지해야만 한다. 공민왕 2년에 [[홍건적]]이 발호하여 고려 국경 인근을 휩쓸고 다녔으며, 1360년에는 홍건적이 4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 단순히 [[비적]] 떼가 아니라 정규군들이 합류하여 철기(鐵起)병 약 1만여 기를 운영할 정도로 정예병이었다.]하여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함락시키고 학살과 약탈을 벌였다. 최영과 이방실이 나서 겨우 격퇴하였으나, 불과 2년 뒤인 1362년에 홍건적은 10만의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공격하여 결국 수도인 개경을 함락시키고 공민왕은 경북 안동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후 최영과 [[이방실]], [[안우]]들이 힘을 모아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경을 수복하였으나, 이와중에 흥왕사의 변이 일어나 공민왕의 목숨이 위협받았다. 최영은 이때에도 다시 병력 일부를 떼내어 [[흥왕사의 변|흥왕사의 난]]을 진압하였고, 공민왕을 구출했다. 최영이 공민왕을 구하고 반란군을 진압하는 한편 홍건적 잔당과 싸우는 와중에 1363년에 [[왜구]]들이 213척에 달하는 대규모 선단을 끌고 수안현을 습격하여 수령을 죽이고, 양민 약 700명을 학살했다. 왜구의 침략도 최영과 [[이방실]]이 격퇴했다. 이듬해(1364)에는 [[원나라]] [[기황후]]의 주도로 [[덕흥군]]과 [[최유(고려)|최유]]가 정명 1만여 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그리고 고려의 주력군이 북방에 집중된 사이 '''같은 연도에''' 왜구는 약 200척의 선단으로 [[갈도]]를 침공했다. 지방 [[호족(한국사)|호족]]과 장수들이 방어를 했지만 대패하고, 결국 최영은 안 그래도 모자란 병력을 나눠 남북양면에 걸쳐 방어전을 펼쳤다. 이처럼 최영이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출전한 사이에 북방의 경계가 조금 소홀해진 틈을 타 원나라 동녕로 박백야대 만호가 군사 약 2만을 이끌고 침공했다. 북방의 방어선이 돌파되자 최영은 다시 북방으로 돌아가 박백야대를 무찌르고, 박백야대를 무찌른 '''그 날에''' 말머리를 돌려 다시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의 왜구를 격퇴하러 출전했다.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 왜구를 격퇴하던 와중에 해가 바뀌고, 1365년 교동도와 강화도에 또 다른 왜구 무리가 침범했고, 최영은 다시 동서강도지휘사가 되어 동강에 나가 왜구들을 무찔렀다. 이처럼 최영은 사서의 기록만 따라도 '''6~7년 내내 전쟁과 전투만을 거듭'''하였다. 이는 과장이 아니며 고려를 적대시했던 조선사의 기록에 남은 역사적 기록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병사들과 백성들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고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 이성계와 대립하였고 조선에서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신돈]]의 혈육으로 주장하면서 반역열전에 기술하는 등 철저히 폄하된 [[우왕]]의 충신이기도 했기에 조선 왕조 때 평가절하를 당할 법도 한데 후대까지 고려하면 의외로 크게 폄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듯하다. 세종 대에 이르러서는 세종실록에 보면 최영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는 신하에 대해서 [[세종대왕]]이 옹호한 기록이 있다. 왕씨가 아닌 우왕을 세워서 섬겼다면서 비판하는 신하에 대해서 세종대왕은 "후에 [[태조(조선)|태조대왕]]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미리 떡밥 깔아준 게 아닐까?" 하는 요지로 반론한 바 있다.[* 이때 신하들은 "그땐 [[태조(조선)|태조대왕]]께서 왕위에 오르실 낌새도 없었는데요."라고 단칼에 잘라버렸다.] 세종은 최영의 자손 중 쓸만한 사람이 있는지 아뢰라고 명하기도 했으며 [[성종(조선)|성종]]은 최영이 아니면 [[임견미]]와 [[염흥방]]을 주살하지 못할 것이었으리라고 평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에 신하들이 최영뿐 아니라 태조도 같이 싸웠다며 태클을 걸었다.] [[중종(조선)|중종]] 때 시강관 윤지형은 "[[고려|전조]] 말엽에 왜구들이 크게 치성하여 도성까지 들어오게 되므로 민생들이 모두 어육이 되었으니, 최영과 우리 태조대왕의 힘이 아니었다면 나라 사세가 거의 멸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고 아뢰기도 했다. [[정몽주]]가 조선 왕조의 창립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절이 조선에서 높이 숭상되었던 것과 비슷한 사례. 조선 초기에는 최영에 대한 언급조차 상당히 경계했지만 후대 왕들은 최영, 정몽주를 통해 고려 말의 부패와 망국의 상황을 더욱 극화하여 역으로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한편, 신하들이 최영과 정몽주가 고려에 충성했듯이 조선에 충성하길 바랐다. 덧붙여 뒤에서 지휘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최전선에 뛰어드는지라 최영은 상처도 많이 입었다. 그런 상처를 입으면서도 분투해서 승리를 거두었고 말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강직하고 두려움 없는 무장이었다. [[홍산대첩]] 때도 그렇고 그 전에 홍건적과 싸울 때도 직접 최전선에 뛰어들어 싸우다 창으로 찔리거나 베여서 여러 번 상처를 입었는데도 싸워 그 전투를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최영의 명성과 높은 평가는 자국에 한정된 게 아니라 타국에도 적용되어 최영이 죽으면 무장 하나 죽는게 아니라 고려 전체에 직결된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최영 열전에서 최영의 명성과 용맹이 근방에도 알려져서 최영이 지금 죽으면 개인이 죽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위신이 위태로워진다고 언급했다. 즉, '''살아있는 것만으로 외적의 침략 억제력 역할'''도 하였던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