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용덕 (문단 편집) === 공군 복귀 === 1950년 5월 차관에서 물러난 이후 [[공군사관학교]]장, 김포기지전투사령관, [[대한민국 공군본부|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을 지냈다. 1952년에는 전임인 [[김정렬(1917)|김정렬]][* 최용덕보다 19살이나 어렸다.]에 이어 2대 공참총장에 올랐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50세의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이야 장성급 장교가 40대 후반 ~ 60대 초반 까지이며, 50세면 준장, 소장급 정도로 한창 나이대이나, 국군 초창기만 해도 30, 40대 장성들이 넘치던 시기였다.] 제 3대 공군사관학교장(1950.5.1.~1952.12.10)으로 재임하며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 김포기지를 방어했다. 그리고 1952년 12월 1일 제 2대 [[공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해 휴전이 될 때까지 공군의 항공작전을 총괄했다. 전쟁이 한창 일때 최용덕 장군은 우리의 손으로 만든 항공기를 꿈꾸었다. 비행기 제작기술은 미래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일임을 직감 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기어코 우리들의 손으로, 우리들의 뇌로서 만들어져 나올 비행기를 자체 제작하고 싶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비행기로서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이 얼마나 비통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최용덕 장군은 항공창을 설립해 대한민국 스스로 비행기를 만들 수 있는 준비를 했고 [[1953년]] 한국 최초의 경비행기 [[부활호]]가 제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부활(復活)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직접 친필 휘호를 내렸다. [[파일:external/b08d7648de559d057918b4fcff1b9ab0d973cc9549f5176b78cab1c745ecbd56.jpg]] 부활호. [[파일:external/www.ecobs.co.kr/3672786899_689cf6af_fred.jpg]] 2004년 10월, 복원되어 50여 년 만에 다시 이름 그대로 부활하여 비행하는 부활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