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윤희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언니 [[최윤정(수영)|최윤정]]도 [[수영]] 선수였는데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동생이 [[금메달]] 딴 종목에서 죄다 [[은메달]]을 땄다. [[최윤정]]은 '''초등학교 3학년인 만 10세 때 성인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고, 만 12세에 성인여자 배영 200m 대한민국 신기록을 세웠으며 만 14세에 출전한 [[1978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는 등 엄청난 기대주였으며, 최윤희가 없었다면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에 오를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스포츠계에서는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때 [[금메달]]을 따도 [[최윤정]]이 딸 것이라 기대했었다. 최윤희가 이전까지 언니를 이겨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도 이러한 예측을 뒷받침했다. 대회가 끝나고 언니는 "너 때문에 내가 [[금메달]]을 못땄다"고 아쉬움을 표시하자, 최윤희는 "내가 없었어도 [[중국]]이나 [[일본]]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언니는 [[금메달]]을 못 땄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이후 언니와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는 후문이 있다. 특이한 것은 만 15세(중학교 3학년) 때인 1982년이 전성기였다는 점이다. 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최윤희 개인 통산 최고 기록 또한 1982년 8월에서 11월 사이에 국내 대회 및 [[아시안 게임]] 본선에서 기록되었다. 불과 만 15세의 나이에 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하면서 향후 성장세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다.[* 최윤희 이후 12년 만인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여자 수영에서 금메달을 딴 조희연도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다. 하지만 최윤희와 마찬가지로 조희연도 이후 세계 무대에서 포텐을 터뜨리지 못했다.] 특히 그녀가 수영 선수로서 전성기에 이를 나이인 [[1988 서울 올림픽]]까지 감안하여 국가적인 지원을 받으며 육성되었다. 게다가 [[서울 올림픽]] 이전에 열리는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소련]], [[동독]] 등 당시 올림픽을 휩쓸던 공산권 국가들이 모조리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에 최윤희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했으며 당시 수영연맹이 최초로 미국 전지훈련을 실시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이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2관왕에 오르며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기록은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 미치지 못했다. 향후 올림픽도 마찬가지로 서울에서 열리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기대 및 우려가 엇갈렸으나, 최윤희는 아시안 게임이 폐막한 후 만 19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조오련]] 이후 10년 만에 나온 [[아시안 게임]] [[수영]] [[금메달]]이라는 실력에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 --기승전--뛰어난 미모와 나이에 비해 성숙하면서도 운동선수다운 탄탄한 체형 등으로 오늘날로 치면 [[국민 여동생]] 비슷한 위치에 오르며 '''당대 최고의 여자 스포츠스타'''가 되었다. 은퇴 후에는 [[포카리스웨트]], [[르까프]] 광고에 모델로서도 활동했다. 당시 최윤희의 모델료 1억원은 강남 아파트 2채 가격이었다. 물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수준의 세계적인 선수까진 아니었지만, 체육 인프라도 미약하고 해외여행도 못하던 시절 [[금메달]] 종목 자체가 적은데[* 특히 한국의 여자 수영은 1970년대까지 아시아권에서도 명함도 못내밀 정도였다. 최윤희 이후로도 아시안 게임 수영에서 금메달을 딴 여자 선수는 조희연, [[정다래]], [[김서영(수영)|김서영]]이 1개씩 딴 것이 전부이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쾌거를 이룬데다 그때가 무려 청소년이었으니 향후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 당연히 국내에선 인기가 좋았다. ''[[아시아]]의 [[인어]]”라는 명칭이 괜히 붙은게 아닌 것. 당시만 해도 여자 스포츠 선수는 광고의 주인공이 되기 매우 어려웠지만 최윤희는 새로 출시한 신생 음료 브랜드인 [[포카리스웨트]](1987년)과 스포츠 용품사인 [[르까프]](1988년)의 CF 모델을 맡았다. 다만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당시에는 [[수영]] 2관왕에 등극했음에도 같은 대회에서 [[육상]] 3관왕을 차지한 [[임춘애]]에 스포츠라이트가 더 비춰졌다. 최윤희는 1982년 [[아시안 게임]]에서도 우승했던 반면 [[임춘애]]는 1986년에 등장한 깜짝 스타였고 불우했던 성장기가 알려지면서 큰 관심을 끌었다. 다만 임춘애는 미인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외모였고 곧 은퇴해 인기가 오래 가진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