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충헌 (문단 편집) == 평가 == 62년 동안 이어진 우봉 [[최씨 정권]]의 초대 집권자로 생전에 진강후(晉康侯)에 봉해져 3대가 세습했다.[* 손자 [[최항]]은 사후에 세습됨.] 본인뿐만 아니라 4대손까지 무신정권 집권자로 세습에 성공한 권력 장악 측면에서는 가장 성공한 무신정권 집권자로 허수아비 왕 아래 명분상으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 실제로는 고려의 최고 실권자로 1196년 4월의 '''병진정변''' 성공 이후 죽는 날까지 군림했다. 실제 최충헌 이전의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 무신 집권자들은 기회만 잘 잡아서 기존의 집권자를 죽이고 권력을 쥐는 형태였다면 최충헌은 최씨가 대를 이어서 장기 집권하는 [[막부]] 체계를 갖추는데 성공한다.[* 실제 [[몽골]]이라는 외부 변수(약 40여 년간의 [[여몽전쟁]]) 때문에 최씨 정권이 무너지지만 그게 아니었으면 얼마나 더 이어졌을지 알 수 없다. 이 경우 변수에 따라서는 훗날 [[조선]]의 이씨 왕조가 들어서는게 불가능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 역사상 첫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 역시 이 시기쯤 태동되었고, 똑같이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과도 비슷한 점이 있는데,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의 무신정권은 붕괴되었고, 막부는 일단 [[태풍]]의 힘으로 [[원나라의 일본 원정|여몽 원정군의 침략을 막아냈으나]], 방어전이라 전리품이랄게 없다보니 보상(토지)을 지급하지 못하여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고, 참전무사들은 불만을 표출해 이는 가마쿠라 막부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물론 이후에도 막부 시대가 이어졌다는 것이 한국(고려)와 일본의 차이지만.] 그러나 최충헌은 본인의 정치 감각과 잔인한 반대파 [[숙청]]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고, 자신과 우봉 최씨 가문의 권력을 극도로 끌어올렸으나 '''<봉사 10조>'''를 내건 초창기 시절 정도를 빼면 갈수록 방탕해져 말기로 갈수록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고, 권력 유지를 위해 힘쓰는 모습만 보이며 왕실을 겁박해 오늘날에는 개혁가보다는 이름난 권신으로 그 이름이 더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사에서 신하의 직위로 [[전무후무]]한 막대한 권위를 가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최충헌과 최씨 집권자들[* 최충헌과 그 이후의 [[최이]], [[최항]], [[최의]] 등.]을 가리키는 '''영공(令公)'''이라는 칭호이다. 최씨 정권 이전에는 왕족이나 고위 관료 등을 가리키는 칭호였던 '영공'이 최충헌의 집권과 정권의 안정화 이후 최충헌 1인만을 가리키는 칭호로 변하고, 이러한 관습이 후대에도 이어졌다는 것이 고려에 대한 최충헌의 거대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현대의 '''[[각하(호칭)|각하]]'''라는 호칭이 [[대한민국 대통령]]만을 상징하게 된 것과 유사하다. 당시 황제는 '''폐하''', 왕은 '''전하''', 훗날의 조선 정승들이 '''[[합하]]'''였다면 고려시대 호칭도 '''영공 전하(令公 殿下)''' 또는 영공 '''저하(邸下)'''였다. 왕족인 제왕들은 "영공 전하", 신하들이 제왕의 반열에 오르면 "영공 저하"라는 경칙을 받았다. "상국 각하"라는 말은 고금상정예문에는 없다. ] 100여 년 뒤에 [[위화도 회군]]을 거쳐 실권을 장악했었던 [[태조(조선)|이성계]]와 비교해도 최충헌의 권세가 못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를 비롯한 우봉 최씨 정권의 후계자들은 군주를 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고려]] 왕조의 지지 기반이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우로 [[청나라]] 말기 [[위안스카이]]가 군주가 되었다가 민심의 반발로 3개월만에 쫓겨난 예를 보았을 때 설익은 왕위 찬탈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 수 있다. 또한 고대에도 [[왕망]]이 무리하게 역성혁명을 하여 신나라를 건국했다가 15년만에 패망한 사례도 있다. 이렇게 쭉 간 게 [[일본]]의 [[쇼군]] 막부 체제이다.] 최충헌의 지지 세력 역시 그를 왕위에 올리려는 생각이 없었는데 한 예로 최충헌과 결탁한 [[문벌귀족]]들은 [[무신정권]] 초반기 암흑기를 보냈으나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최씨 집권기 때는 무신 가문들과 혼인하는 등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세력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는데 고려라는 틀을 지키기를 바랬지 새 왕조 개창을 바라는 집단은 아니었다. 이들이 완전히 몰락함은 [[대몽항쟁]]을 지난 [[원 간섭기]] 때로 이 시기에 자신들의 자산이었던 토지가 작살나고, [[권문세족]]들에게 실권을 모두 빼앗기면서 사라져갔다. 문벌귀족이 사라짐은 무신정권 이래로 [[외척]]이 못 나왔던 탓도 있다.[* 원 간섭기에는 [[왕후]]가 [[원나라]]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황실의 공주였다.] 지방 호족이었던 전주 이씨 가문의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왕조를 뒤집어엎기를 바란 신진[[사대부]]의 지지와 그의 개인 영지를 기반으로 한 사병, 즉 [[가별초]] 덕분이었는데 최충헌은 그 점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고, 개인적인 면모를 봐도 이성계는 단순히 지배층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올라간 것이 아닌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으로서의 면모 또한 갖추었기에 민심도 확보하고 있었지만 최충헌은 그런 업적이 전혀 없었다. 심심하면 [[홍건적]], [[여진족]], [[왜구]]의 침입과 노략질이 이어지고 왕실이 민심을 상실한 고려 말기와는 달리 최충헌 대에는 무신정권 이후로 착취가 심해져서 민란이 자주 일어나기는 했지만 외부의 침입은 거의 없었기에 아직 국가 시스템 자체는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는 군주를 하고 싶어도 실제로 그랬다가는 순식간에 [[끔살]]당하거나 나라가 쪼개질 판이었으니 도저히 할래야 할 수가 없었던 것.] 최충헌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집권한 [[고구려]]의 [[연개소문]]이나 제8대 [[현종(고려)|현종]] 때의 [[강조(고려)|강조]]와 비교해볼 때도 차이가 나는데, 두 사람은 군주를 [[시해]]하는 과정을 거쳐 권력을 차지했지만 탄탄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군주도 함부로 몇 번씩 갈아치우지도 않았다. 연개소문은 비록 후계자 선정 때문에 빛이 바랜 측면은 있으나 양면전쟁의 위기에 처했으면서도 [[안시성 전투]]와 [[사수 전투]]에서 세계 제국 [[당나라]]의 침공을 격퇴하는데 성공을 거두면서 전쟁 지휘에 있어서는 매우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조 역시 솔선솔범해서 전쟁에 나섰고, 비록 [[성종(요)|요성종]]에게 [[통주 전투]]에서 대패하여 사로잡혔지만 죽음을 앞두고 국문을 당했을 때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허나 그에 반해 최충헌은 보신에만 급급했고, 자신의 안위에 문제가 되면 혈육도 죽이며 군주도 여러 번 갈아치웠다. 권세는 대단했지만 그건 오로지 자신이 고려의 [[무관]]직을 가졌기 때문에 가질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장 가지고 있는 군사력도 [[군벌]]로서 가진 군대가 아니라 국가의 군대였으며, 가진 경제력도 일천했기에 재물과 사병을 모으려고 그렇게 악착같이 토지와 인력을 긁어모은 것이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타도할 때 내세운 명분이 '''군주 시해범'''이라는 것이었는데, '''"[[의종(고려)|의종]]을 시해한 범인을 제거한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이 그의 [[쿠데타]]를 용인한 주된 이유였다. 그 말뜻은 즉 최충헌 본인도 이의민과 같이 군주 시해를 저지르면 타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도 담겨있으며 군주 시해에 대한 사회적 반발도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군주를 시해하지 않고 양위받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어지간한 군주들은 살해 협박에 내몰려도 조상으로부터 이어온 사직을 자기 대에서 남의 손에 넘기는 선택은 필사적으로 거부한다.[* 조정의 여론을 완벽히 장악한 이성계의 선위 요구를 받은 [[공양왕]]조차도 끝까지 거부하고 저항했는데 조정의 여론을 그만큼 장악하지도 못한 최충헌에게 고려 군주들이 옥좌를 넘겨줄 리가 없었다.] [[허수아비]] 군주지만 그 존재를 무시하기에는 고려 왕실을 지탱하는 기득권 세력도 많았고, 그들 대부분이 전통적인 [[문벌귀족]]들이었으며 귀족이라는 정치 세력의 대표자가 바로 군주였다. 귀족들이 동조해주지 않는 한 최충헌 스스로 군주를 시해하거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기에 오히려 군주를 앞세워 귀족들을 통제하는 편이 권력을 유지하는데는 훨씬 유리했다.[* 사실 군주라는 존재가 마냥 걸림돌은 아니었던 것이 정권 유지를 위한 방파제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한 예로 [[신라부흥운동]]과 같은 반란을 진압할 때에는 고려 왕실과 군주의 존재가 반란 진압의 중요한 근거이자 명분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충헌은 이전 집권자들의 모습에서 교훈을 얻은 모습을 보이는데, 문신들을 적대하면서 딸을 태자비로 보낸 이의방의 몰락을 두고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멀쩡한 태자비를 쫓아낸 최충수의 행동을 두고 '''"[[이의방]]이 어떻게 됐는지 잊었냐?"'''라고 하며 정중부가 했던 문신들과의 결탁을 그대로 따라해 문신들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만들었으며, 경대승의 도방을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어 폐지해버린 중방을 대신하는 새로운 통치기관으로 삼았으며,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이 받던 수많은 불이익들을 교훈 삼아 명종과 희종을 시해하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이전 집권자들의 장단점들을 참고한 것이 티가 나게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