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충헌 (문단 편집) === 성장과 순탄치 않았던 벼슬길 === 고려 최고위 무관직인 상장군을 역임한 최원호의 아들로 그의 외조부인 [[유정선]][* '금자광록대부 - 중서령 - 상장군'을 역임했다.]도 상장군을 지낸 전형적인 무인 가문 출신이다.[* <최충헌 묘지명>에 따르면 증조부 최주행, 조부 최정현도 관직을 지냈지만 높은 관작에 오르지 못했다고 하니 아버지인 최원호가 상장군을 역임하며 우봉 최씨 가문이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문신이 득세하던 시절이라 당시 부친의 뜻에 따라 글을 배워 처음에는 [[음서]]로 문관 벼슬에 진출했다. 문관이 된 후 양온령에 임명되었으며 성릉직, 위위주부 등을 거쳤다가 스스로 도필리[* 刀筆吏. [[아전]]의 낮춤말이다.]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흥위위[* 고려 중앙군인 2군 6위 중 6위.], 보승[* 위 밑에는 정용과 보승으로 나뉘었다.], 산원[* 하위 무관직.]으로 옮겼다. 1170년 8월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문관에서 무관으로 빠르게 탈바꿈했으며, 제19대 명종 4년인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을 때부터 출세 코스를 타게 되는데 당시 [[무신정변]]에 동참한 공로로 권력을 얻었던 부원수 기탁성[* [[행주 기씨]]이다.]에게 발탁되어 별초 도령[* '별초'는 소대 같은 부대명, '도령'은 소대장 같은 직위.]이 되었고,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흥위위 별장으로 승진했다. 1176년 지안동부사부사(知安東府事副使)[* 외직으로 안동도독부의 차관.]에 임명되면서 서리들에게 엄하면서도 백성들에게 관대하여 찰방사가 그 공이 으뜸이라 보고했으며[* 다만 최충헌 찬양 일색인 <최충헌 묘지명>의 내용이라 신뢰성은 떨어진다.] 임기가 끝나자 1180년 응양부[* 응양군의 다른 말.] 섭[* 임시로 맡았다는 표기.]낭장[* 하위 무관직.], 1181년 응양부 낭장[* <최충헌 묘지명>에는 '진'낭장이 됐다고 하는데 이는 전에 낭장직을 '섭'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승진가도를 달리던 그의 관직 승진 속도는 이의민 집권기부터 쭈욱 줄어든다. 1187년 [[경상도|경상진주도]] [[안찰사]]에 임명되었다가 [[이의민]]의 뜻에 거슬려 [[탄핵]]을 받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용호군[* 2군 6위 중 2군.] 섭중낭장[* 중낭장은 장군 바로 아래인 무관직.]에 임명되었다가 1188년 용호군 중낭장이 되었다. 1193년 감문위 중랑장, 감문위 차[* 임시인 '섭'직보다 더 낮은 '빌렸다'는 뜻.]장군이 되었다가 1194년 감문위 섭장군이 되었으며, 1195년 □□좌우위 정용 섭장군이 되었다. □□(으)로 되어 있는 것은 최충헌의 묘지에서 글자가 훼손되었기 때문에 알 수 없으며 아래에 나올 □□도 동일한 이유다. 10년도 채 안되어서 낭장까지 오르다가 중랑장으로 가는 속도가 꽤나 오래 걸렸고, 이후에는 섭장군에 머무르는 것만 보더라도 이의민 집권기 때 그가 철저하게 승진 인사에서 배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이 이의민 척결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