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출사표 (문단 편집) === 후출사표(後出師表) === 번역본은 [[https://ko.wikisource.org/wiki/%ED%9B%84%EC%B6%9C%EC%82%AC%ED%91%9C|위키문헌 후출사표]]에서 가져왔으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BY-SA 라이선스]][[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deed.ko|#]]로 배포된다. 원문은 저작자가 사망한 지 100년이 넘어 [[퍼블릭 도메인]]으로 배포된다. >[[유비|先帝]]慮 '''[[한나라#s-3.2|漢]][[위(삼국시대)|賊]]不兩立 王業不偏安''' 故託臣以討賊也 >선제려 한적불양립 왕업불편안 고탁신이토적야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固知臣伐賊 才弱敵强也 然不伐賊 王業亦亡 惟坐而待亡 孰與伐之 是以託臣而弗疑也 >이선제지명 양신지재 고지신벌적 재약적강야 연불벌적 왕업역망 유좌이대망 집여벌지 시이탁신이불의야 > >臣受命之日 寢不安席 食不甘味 思惟北征 宜先入[[남만|南]]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幷日而食 臣非不自惜也 >신수명지일 침불안석 식불감미 사유북벌 의선입남 고오월도로 심입불모 병일이식 신비부자석야 >顧王業不可偏安於蜀都 故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 而議者謂爲非計 今賊適疲於西 又務於東 兵法乘勞 此進趨之時也 謹陳其事如左 >고왕업불가편안어촉도 고모위난이봉선제지유의 이의자위위비계 금적적피어서 우무어동 병법잉로 차진추지시야 근진기사여좌 > >[[고제(전한)|高帝]]明幷日月 謀臣淵深 然涉險被創 危然後安 今陛下未及高帝 謀臣不如[[장량(전한)|良]][[진평|平]] 而欲以長策取勝 坐定天下 此臣之未解一也 >고제명병일월 모신연심 연섭험피창 위연후안 금폐하미급고제 모신불여량평 이욕이장책취승 좌정천하 차신지미해일야 > >[[유요|劉繇]][[왕랑(삼국지)|王朗]]各據州 論安言計 動引聖人 群疑滿腹 衆難塞胸 今歲不戰 明年不征 使[[손책|孫策]]坐大 遂幷江東此臣之未解二也 >유요왕랑각거주 논안언계 동인성인 군의만복 중난새흉 금세부전 명년부정 사손책좌대 수병강동차신지미해이야 > >[[조조|曹操]]智計 殊絶於人 其用兵也 彷彿[[손무|孫]][[오기(전국시대)|吳]] 然困於南陽 險於烏巢 危於祁連 逼於黎陽 幾敗北山 殆死潼關 然後僞定一時耳 >조조지계 수절어인 기용병야 방불손오 연인어남양 험어오소 위어기련 핍어여양 기패북산 태사동관 연후위정일시이 >況臣才弱 而欲以不危而定之 此臣之未解三也 >황신재약 이욕이불위이정지 차신지미해삼야 > >曹操五攻[[창희|昌覇]]不下 四越巢湖不成 任用[[왕자복|李服]] 而李服圖之 委任[[하후연|夏侯]] 而夏侯敗亡 先帝每稱操爲能 猶有此失 況臣駑下 何能必勝 此臣之未解四也 >조조오공창패불하 사월소호불성 임용이복 이이복도지 위임하후 이하후패망 선제매칭조위능 유유차실 황신노하 하능필승 차신지미해사야 > >自臣到[[한중|漢中]] 中間期年耳 然喪[[조운|趙雲]] 陽群 馬玉 [[염지#s-4|閻芝]] 丁立 白壽 劉合 鄧銅等 及曲長屯將七十餘人 突將 無前 賓 靑姜 散騎 武騎一千餘人 >자신도한중 중간기년이 연상조운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등 급곡장둔장칠십여인 돌장 무전 빈 청강 산기 무기일천여인 >此皆數十年之內 所糾合四方之精銳 非一州之所有 若復數年 則損三分之二也 當何以圖敵此臣之未解五也 >차석수십년지내 소규합사방지정예 비일주지소유 약복수년 즉손삼분지이야 당하이도적차신지미해오야 > >今民窮兵疲 而事不可息 事不可息 則住與行 勞費正等 而不及早圖之 欲以一州之地 與賊持久 此臣之未解六也 >금민궁병피 이사불가식 사불가식 즉왕여행 노비정등 이불급조도지 욕이일주지지 여적지구 차신지미해륙야 > >難平者 事也 昔先帝敗軍於楚 當此之時 曹操拊手 謂天下已定 然後先帝東連吳越 西取巴蜀 擧兵北征 夏侯授首 >난평자 사야 석선제패군어초 당어지사 조조부수 위천하이정 연후선제동련오월 서취파촉 거병북정 하후수수 >此操之失計 而漢事將成也 然後吳更違盟 [[관우|關羽]]毁敗 秭歸蹉跌 [[조비|曹丕]]稱帝 凡事如是 難可逆見 >차조지실계 이한사장성야 연후오갱위맹 관우훼패 자귀차질 조비칭제 범사여시 난가역견 >臣'''鞠躬盡力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竟睹也. >신'''국궁진력 사이후이''' 지어성패리둔 비신지명소능역경도야. >선제께옵서는 '''"[[한나라#s-1.2.|한나라]]와 [[위(삼국시대)|역적]]은 서로 양립할 수 없으며, 황업(皇業)은 [[익주|천하의 한 귀퉁이]]로만 안주할 수 없다"'''[* 이것이 2010년 신삼국에선 촉한 소속 사람이라면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 입이 닳도록 외치는 슬로건으로 등장하는 '한적불양립, 왕업불편안'이다. 한의 원수인 위를 반드시 쳐 없애야 하며, 촉한의 영토가 작기 때문에 촉한은 위를 쓰러뜨리지 않고 현상에 안주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아 촉한의 이데올로기를 단 한 문장으로 아우르는 명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인 것과 별개로 봐도 [[위진남북조 시대]]와 [[오대십국시대]]의 선례~~미래~~를 보았을 때 현실적으로도 촉한의 영토로만 고정되면 늦든 빠르든 강국에게 멸망당하는 길밖에 없다.] 하시어 신에게 역적의 토벌을 당부하셨나이다. 선제께서 그 밝으심으로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니 역적을 벌함에 신의 재주가 얕고 역적은 강함을 아셨사옵니다.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아니한다면 황업 또한 망할 터이니,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린다면 누구와 더불어 역적을 징벌하오리까. 이 때문에 신에게 탁고하시고 의심하지 않으신 것이옵니다. > >신은 선제의 명을 받은 이래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사옵니다. 북쪽을 칠 생각을 하니 우선 [[남만|남방]]부터 평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지난 건흥 3년(225년) 5월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 깊숙이 들어가 하루의 양식으로 이틀을 먹는 고생을 한 것은 신이 몸을 아끼지 않음이 아니라, 황업을 생각하오니 촉 땅에서 편안히 지내서는 천하를 통일할 수 없어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 선제의 유지를 받든 것이옵니다. 그런데 따지기 좋아하는 무리들은 이것이 올바른 계책이 아니라고 하나이다. 이제 역적은 마침내 서쪽에서 고달파지고, 다시 동쪽에서 오나라의 군사들과 싸워 지쳐 있사옵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이 피로할 때를 타 공격하라 하였으니[* [[손자병법]]의 [[손자병법#s-2.6|허실(虛實)편]]에 나온 내용], 지금이 바로 과감하게 나아갈 때라 사료되옵니다. 이에 신은 삼가 몇 가지를 아뢰옵나이다. > >옛날에 [[한고제|고제]]께옵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고 신하들의 재주가 연못처럼 깊었으나 험난한 일을 당하고 상처를 입으며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비로소 평안해지셨사옵니다. 이제 폐하께옵서는 고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신료들 또한 감히 [[장량(전한)|장량]]과 [[진평]]같은 자가 없는데도,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 좋은 계책으로만 승리하여 가만히 앉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니 이는 신이 이해할수 없는 첫 번째 일이옵니다. > >또한 [[유요]]와 [[왕랑(삼국지)|왕랑]]은 각각 주와 군을 다스리며 안위와 계책을 말하면 입만 열면 성인을 운운하고 벗속에는 의심이 가득하여 여러 어려움 앞에서는 겁내고 두려워 하였사옵니다. 그리하여 올해도 싸우지 않고 다음해에도 싸우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손책]]이 앉아서 강동을 차지하였으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일이옵니다. > >[[조조]]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 그 용병술은 [[손무|손자]]와 [[오기(전국시대)|오자]]를 닮았으나 [[조조/생애#s-2.11|남양에서 어려움]]에 처하고[* [[장수(삼국지)|장수]]와의 완 전투] [[관도대전#s.3-3|오소에서 험한 일]]을 겪고[* [[관도대전]] 중 오소 습격] 기련에서 위태로움에 처했으며[* 기련은 산의 명칭으로, [[간쑤성]] 서부와 [[칭하이성]] 동북부 경계에 위치해 있다. 다만 조조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지명인데 왜 후출사표에 등장하는가는 의문.] [[조조/생애#s-3.9|여양에서 핍박]]을 당하고[* 송원 교체기의 학자 호삼성(胡三省)은 이 부분에 대해 '[[원담]] 형제를 공격할 때를 말한다.'고 얘기했다.] [[조조/생애#s-3.13|북산에서 거의 패배]]하고[* 호삼성은 '백랑산에서 [[오환]]과 교전을 벌였을 때를 말한다.'고 얘기했다.] [[조조/생애#s-4.3|동관에서는 죽을 뻔한]][* [[마초]]와의 동관 전투] 뒤에야 비로소 한때나마 거짓으로 천하를 평정했는데, 재주도 미약한 신하들이 어찌 위태로움을 겪지 아니하고 천하를 평정하려 하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 일이옵니다. > >조조는 다섯 번이나 [[창희|창패(昌覇)]][* [[정사 삼국지]] 선주전과 후출사표에서는 창희를 창패로 칭한다.]를 치고도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였고 네 번이나 소호[* 巢湖, [[안후이성]] 중부에 위치한 호수이며, 바로 옆에 합비([[허페이시]])가 위치한다. 따라서 합비를 통해 [[오(삼국시대)|동오]]를 공격한 것을 일컫는 것.]를 건넜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왕자복|이복(李復)]][* 이복은 왕자복의 다른 이름이다.]을 등용하였으나 오히려 배반당하고 [[하후연]]에게 일을 맡겼으나 [[한중 공방전#s-3.4|하후연이 패망]]하였사옵니다. 선제께서 항상 뛰어난 인물이라고 칭찬하신 조조조차 이렇게 실패하곤 하였는데, 하물며 신 같이 아둔한 사람이 어찌 쉽게 이기기만을 바라겠나이까.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네 번째 일이옵니다. > >신이 [[한중]]에 온 지 이제 1년 남짓 되었는데, 그 동안 [[조운]], 양군, 마옥, [[염지#s-4|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 등 70여 명의 곡장과 둔장을 잃어 선봉장으로 앞장설 사람이 없사오며 종수[* 장수 이름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종(賨)은 파주(巴州)에 살던 사람들을 지칭하고, 수(叟)는 촉의 별칭이다.], 청강[* [[강족]] 병사들을 뜻함], 산기, 무기 등 1천여 명을 잃었사오니 이는 모두 수십 년 동안 사방에서 모아온 정예병이지 [[익주]] 한 주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옵니다. 만약 또 다시 몇 해를 보내면 셋 중 둘을 잃게 될 터이니 그때는 무엇으로 역적을 도모하겠사옵니까.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섯 번째 일이옵니다. > >바야흐로 백성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사오나 대사를 그만둘 수는 없사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지키고 있는 것이나 나아가서 싸우는 것이나 그 노고와 비용은 같은데도, 속히 도모하지 아니하고 오직 한 주에만 머물러 역적과 더불어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사오니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섯 번째 일이옵니다. > >무릇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나 천하의 일인지라, 옛날 선제께옵서 [[형주|초 땅]]에서 패하셨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며 천하는 평정되었다고 좋아했사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제께옵서는 동쪽의 [[적벽대전|오월과 손을 잡으시고]], 서쪽으로는 [[파촉]]을 취하고 군사를 일으켜 [[한중 공방전|북쪽을 쳐서 하후연의 목을 베셨사옵니다]]. 이는 바로 조조의 실수로 한나라의 대업이 이루어지려 하였사오나 [[형주 공방전|동오가 맹약을 어겨 관우를 죽이고]] 선제께옵서는 [[이릉대전|자귀에서 패하시오니]] [[조비]]가 황제를 참칭했사옵니다. 이렇듯 일은 미리 헤아리기가 어렵사옵니다. 이제 신은 '''엎드려 몸을 바치고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일할 뿐이오니'''[* 여기서 나온 말이 제갈량을 상징하는 말 중 하나인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이다. 뒷날 [[청나라]]의 황제 [[강희제]]가 이 말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한 신하가 "제갈량의 이 말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자세이지, 임금이 가질 자세는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강희제는 "짐은 하늘을 섬기는 신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중국 총리]]이자 중국 현대사의 제갈량으로 불린 [[저우언라이]]의 좌우명이 되기도 하였다.], 일의 성패와 이해에 대하여서는 신이 미리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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