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출사표 (문단 편집) == 후출사표 위작설 == 후출사표는 이전부터 [[위서]]라는 얘기가 나돌았으며 특히 [[오(삼국시대)|오나라]]의 [[제갈각]]이 범인으로 꼽혔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후출사표는 [[촉한|촉]]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며, 오나라의 [[장엄]]이 쓴 <묵기(默記)>라는 책에만 나온다. 훗날 한진춘추를 쓴 [[습착치]] 역시 제갈량의 2차 북벌을 기록하면서 후출사표를 덧붙일때 뭔가 석연치 않았는지 '후출사표는 [[제갈량집]]에는 없는 이야기인데...'라는 식으로 자신이 확인한 것을 덧붙였다. [[배송지]] 역시 습착치의 이 의견을 그대로 실었다. 1. 제갈각이 북벌을 준비하면서 반대파들에게 내세운 논지가 후출사표와 비슷하다. 1. 황제에 대한 태도가 제갈량의 다른 언행들과 사뭇 다르다. 유선이 [[암군]]에 가깝다고는 해도, 제갈량은 유선을 언급할 때마다 총명하다, 배우기 좋아한다는 식으로 칭찬했으며, 고쳐야 할 점이 있어도 간접적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그런데 후출사표에서는 유독 질책이 심하다. 유선의 재능이 어쨌든 간에 '''"한고조만 못하시면서 가만히 계셔서야 되겠습니까?"'''라며 황제를 강하게 책망하는 모습은 충신 제갈량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 그 외에도 전출사표보다 떨어지는 문장력(중언부언하거나 억지 대구)과 지나치게 의기소침한 태도[* '뛰어나다는 조조도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보다 못한 우리는 어쩌겠습니까?'와 같은 부정적인 표현이 자주 눈에 띈다.], 전출사표에서는 유선에게 올리는 당부가 있었으나 후출사표에서는 예전 일을 자주 들먹이는 점, 조운이 졸한 연도는 229년인데 조운을 잃었다고 표현한 이 표는 228년 11월에 올린 것으로 되어있다는 점, 촉과 별 상관도 없는 유요와 왕랑의 강동 행적을 들먹인다는 점,[* 사실 제갈량이 숙부 제갈현을 따라 잠시 유요가 있던 예장으로 온 적은 있었다.] 정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인명의 나열로 위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오나라에서 쓰였다고 보기에는 손책을 함부로 들먹인 것 아니냐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손권부터가 손책을 황제가 아닌 장사환왕으로 올리는 등 미심쩍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어디까지나 제갈량이 썼다고 가정한 위작이라면 굳이 문제될 거 없다. 물론 위작설이 있으면 이에 대한 반론도 있을 수 있는데, 몇 가지 근거를 대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제갈각과 장엄 간의 관계는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장엄은 열전없이 기록된 부분도 매우 짧은데 제갈각과 함께 등장하는 기록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1. [[왕랑]]은 이미 223년[* 유비가 사망한 바로 그 해]에 [[화흠]], [[진군]], 제갈장(諸葛璋)과 함께 제갈량에게 거짓 황제놀음을 그만두고 항복하라는 서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제갈량은 '정의(正議)'라는 글을 지어 서신을 보낸 자들과 [[조위]]를 가루가 되도록 깠다. 내용은 [[제갈량]]의 설전 VS 위나라에 나온다. 따라서 왕랑의 과거 행적을 두고 그를 부정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마침 왕랑이 죽은 시점이 228년 11월인데 후출사표가 올라간 시점이 228년 11월로 되어 있기도 하다. 1. 후출사표에선 동오가 배반하여 [[관우]]를 죽였다고 하는데 이는 손권이 한 일이며 제갈각은 진심으로 손권에게 공경을 다하여 충성을 다했다. 아무리 교활한 [[제갈각]]이라도 (손권이) 배반하였다고 쓸 수 있었을까? 1. 사실 촉한과 관련 없는 일은 유요와 왕랑의 일뿐이고 먼 과거의 일만 아니라 당장 석정 전투 이후 위나라의 피해도 언급하고 있으며 촉한의 일인 이전에 시행했던 [[적벽대전]], 남정, [[한중 공방전]], [[형주 공방전]]도 충분히 예를 들고 있다. 1. 염지의 경우는 [[유비]]가 효정에서 패했을 때[* [[이릉대전]] 때의 일이다.] '파서 태수 염지가 여러 현의 군사 5천을 일으켜 결손된 병력을 보충했다'는 기록이 촉서 마충전에 있어 실존 인물임이 교차검증된다. 거의 20~30년 전에 [[촉한]]의 지방관을 지낸 인물을 [[제갈각]]이 일일이 기억하고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후출사표의 의기소침해 보이는 태도는 결국 하나로 귀결되니 자신을 낮추면서도 '성패에 상관없이 그럼에도 국궁진력하여 사이후이해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 이는 전출사표에서 '늙고 아둔하나마 있는 힘을 다한다'는 뜻과 같다. 반면 [[제갈각]]은 자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은 안된다는 오만한 태도를 취해 두 표문 자체에서 보이는 태도가 다르다. 제갈각의 경우엔 표문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지금 내가 국가가 가지고 있는 자본을 이용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위엄에 의지한다면 어디들 간들 이기지 못하겠소?"라고 하기까지 했다. 또 후출사표 자체는 [[자치통감]]에도 일단 수록되었다. 당대 사료가 많이 남아있던 시기엔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 물론 오나라의 기록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후세 사람, 특히 [[제갈각]]의 윤색이 있을 수는 있다고 판단이 가능하다. 제갈각이 무조건적인 북벌의 당위성을 위해 아예 없는 걸 지어낸 게 아니라 ''''원래 있던 숙부 [[제갈량]]의 표문에 자기가 손을 댔다''''고 하면 후출사표에 대한 의문이나 그에 대한 반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된다. 당시 제갈각은 다른 사람의 반대에 '북벌이 최우선 과제'라 반론해대고 있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후출사표를 윤색하여 자기 논지를 강화하는데 사용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제갈각의 후출사표 위작 논란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위작 논란의 대상자인 조카 [[제갈각]]을 비롯한 당대의 인물들은 제갈량이 충분히 '국궁진췌 사이후이, 한적불양립'을 외칠 만한 인물이고 최선을 다해 대의를 위해 충심을 다해 몸바쳐 일한 인물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후출사표는 [[제갈량]]이 쓴 것이 맞을 것'이라는 인식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나라에서도 그 인물의 권위를 빌려 나라의 중요 정책에 이용하려고 했다는 점, 그것도 아무리 조카라곤 해도 평소 매우 오만한 성품이던 제갈각이 굳이 다른 나라에서 활동한 숙부인 제갈량의 권위를 빌리려 했다는 점에서 그만큼 당대에 제갈량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시대의 거물로 존경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위작 논란은 계속되겠으나 후출사표는 '[[제갈량]]이라는 인물이 당대에 어떤 인물로 여겨졌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국궁진췌 사이후이'라는 말 자체도 지금까지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제갈량]]'이란 인물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문장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