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출애굽기 (문단 편집) ===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문제 === 탈출기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스라엘 민족'(히브리인)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다. 즉, '''탈출기는 히브리 즉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민족'은 과연 언제 형성된 것일까? 성경 외의 자료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최초로 언급되는 문헌은 기원전 13세기가 끝나기 직전 [[람세스 2세]]의 아들인 파라오 [[메르넵타]]가 가나안을 원정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 비석의 내용에 따르면 이집트 원정군이 가나안에 침공하여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민족을 대량 학살했고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후예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공언하였다. >왕들이 엎드려 외친다: “자비를 베푸소서” >아홉 개의 활 아래 머리를 들 수 있는 자는 없다. >테헤누(Tehenu)에는 쇠락이, 하티에는 평화가 왔다. >가나안은 약탈당하고 각종 재난을 맞이하였다. >아스겔론(Ashkelon)은 정복되었다. >게제르(Gezer)는 함락되었다. >야노암(Yanoam)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다. 이스라엘의 후예는 이제 없다. 이 자랑에는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그 시기에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특정 민족 집단이 이미 가나안에 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문제는 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언제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냐 하는 것이다. 정말 이집트에서 이주해 온 집단인가? 아니면 가나안 토착 민족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러 집단이 섞인 것인가? 탈출기 속에는 여러 시대의 역사적, 지리적 사실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집트 탈출이 벌어졌을 단 하나의 특정한 시대를 가려내기가 어렵다. 고대에는 이집트로 가는 이민의 물결이 주기적으로 끝없이 계속되었다. 중기 청동기 시대에 힉소스족이 삼각주 지역을 지배한 구체적인 사실도 있다. 또한 람세스 시대의 이집트와 관련된 몇 가지 요소를 연상시키는 내용들이 성경에 등장하고[* 가령 [[홍해]]와 동부 삼각주의 '시홀(Shihor)' 강, 이스라엘인들이 머물렀던 '비하히롯(Pi Hahiroth)'의 야영지 등 탈출기의 수많은 지명은 이집트 어휘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들이 탈출기와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집트 역사의 특정한 시대에 이집트 탈출이 일어났다고까지 콕 찍어 주는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할 '전기설과 후기설' 참고.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탈출기에 묘사된 기본적인 상황, 즉 야곱의 가족들이 정착한 것처럼 이민 집단이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내려와 이집트 동쪽 국경의 삼각주 지역에 정착한 현상은 고고학적인 발견과 역사기록 문서에 의해서 충분히 확인된다. 초기 역사 시대 이후 고대 세계에서, 가뭄과 기근 혹은 전쟁으로 생활이 견디기 어렵거나 힘들어질 때마다 가나안인들에게 이집트는 안전한 피난처로 생각되었다. [* 사실 이집트가 꽤 풍요롭고 부강한 나라이긴 했다. 창세기에서도 [[아브라함]], [[이삭]]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가는 내용이 나온다. 나중에 요셉과 마리아 부부도 [[헤롯 대왕]]을 피해 어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잠깐 피난해 왔었다.] 고고학 연구 결과 청동기 시대에 가나안 남부 지방에서 이집트 삼각주 지역으로 이주한 셈족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이동했음이 밝혀졌으며, 그 집단마다 이주 동기 역시 다양했고 이주한 뒤 성공한 정도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이집트 공공 건축사업의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문제는 '''이 셈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집트학 학자인 도널드 레드퍼드는 힉소스 족이 이집트를 점령한 사실과 그들이 삼각주에서 무력에 의해서 추방된 대규모 사건들의 반향이 여러 세기 동안 전승되어 가나안 주민들의 공통적인 기억의 핵심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마네토, 멘데의 프톨레미(Ptolemy of Mendes)와 같은 역사가들과 에우세비우스(Eusebius), 히폴리투스(Hippolytus), 클레멘트(Clement), 타티안(Tatian), 데오빌루스(Theophilus)와 같은 교부들은 힉소스 패퇴를 출애굽과 동일시했었다. 참고 [[https://www.bibleandscience.com/archaeology/exodusdate.htm|#]]] 이집트에 정착하여 삼각주의 지배권을 장악한 후 나중에 쫓겨나 고향 땅으로 되돌아온 이 가나안 출신 식민 통치자들에 관한 각종 이야기가,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집트가 가나안에 대한 통치의 고삐를 더욱 조일 당시 가나안인들의 단결과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민족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민족적 정복설[* 윌리암 팍스웰 올브라이트(W. F. Albright)의 주장], 평화 이주설[* 알브레이트 알트(Albrecht Alt)의 1925년 논문 (“Die Landnahme Der Israeliten in Palästina”) ], 농민 반란설[* 조지 멘덴홀(George Mendenhall)의 1962년 논문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등이 제기되었는데, 최근에는 평화 이주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1200년)와 초기 철기 시대(기원전 1200~1000년)에 걸쳐 있다고 추정되는 고대 가나안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면, 팔레스타인 북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향하는 산간 지대에서 고고학적 출토물이 나왔음이 확인된다. 고고학자들은 이 중앙 산간 지대에, 기원전 1250년 이후 갑자기 생긴, 성곽이 없는 몇백 개의 작은 마을들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팔레스타인의 초기 청동기 시대에 중앙 산간 지대의 인구는 초기 청동기시대에는 1만 2,000명, 12세기는 5만 5,000명, 200년 후에는 7만 5,000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인구가 대폭 늘어났던 현상을 해당 지역의 작은 유목민들이 정착한 것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우며, 결국 12세기경에 가나안 외부로부터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이들 중 일부가 이집트에서 나온 노예들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만들었다고 보인다. 즉 가나안의 도시 군주 국가들에게서 억압받고 도망 나온 다양한 하층 민중들이 팔레스타인의 중앙 산악 지대에 거주할 때, 사회적 하층민에 있던 '하비루(Habiru)'[* 성경의 '히브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본래 발음은 '아피루' 에 더 가깝다는 연구도 있으니 주의.]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부터 탈출해 해방하여 나왔고, 광야와 가나안 남부의 사막 지역에서 그들의 신으로 [[야훼]]를 선택한 후에 이 두 집단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략 1,200년경 가나안에 정착했다는 가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평화적인 정착은 분명하나 이집트에서 탈출한 노예들이 주요 집단이라는 가설은 전혀 주류가 아니다. 진짜 주류의견은 가나안 외부에서 유입이라기 보다는 가나안 내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농민 반란설과 유사하게 후기 청동기시대의 붕괴 과정에서 가나안 저지대 도시국가들에서 이탈한 농민들이 당시 거의 비어있던 고지대에 정착했다는 가설이다. 고고학적으로 당시의 물질문화는 가나안 문화와의 연속성이 뚜렷한 반면 가나안 외부에서 대규모 인구유입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집트에 가나안 중앙 고지대 까지 아무런 흔적없이 대규모 인구집단이 이동할수는 없다). 무엇보다 당시 가나안은 오랜기간 이집트에 복속된 일종의 속국과 같은 곳이었다. 비록 후기청동기 말의 쇠퇴로 위축된 부분이 있다하더리도 기원전 12세기는 물론 이스라엘 왕국성립 이후에도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기에 이집트를 탈출한 집단이 정착할 곳이 못 된다. 또한 윗문단에 언급된 '하비루'는 애초에 가나안 사람이라서, 좀더 이전 시기인 아마르나 문서에 가나안 도시 국가의 왕들이 파라오에게 보낸문서에 하비루들이 깽판쳐서 힘들다는 식으로 여러번 언급되어있다. 성서 전승을 존중하여 일부 이집트 출시 유이민 집단이 참여하여 출애굽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가설은 설득력 있지만 초기 이스라엘 정착지의 인적구성의 대부분은 가나안 내부에서 비롯되었을 수밖에 없다. 서기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 학자 아피온은 <[[유대인]]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를 인용하면서, 과거 이집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나병]] 환자들이었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출애굽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사서이자 스토아 철학자 카이레몬도 아피온과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이시스]] [[여신]]이 꿈 속에서 당시 파라오 아메노피스에게 나타나 전쟁 중에 자신의 신전이 파괴된 것에 대해 꾸짖었고, 거룩한 서기관 프리토바우테스가 파라오가 이집트에서 오염된 사람들을 쫓아낸다면 더 이상 경고를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권했다고 서술했다. 이에 파라오는 25만 명의 병자를 모아서 추방시켰는데, 그들의 지도자 중에는 오사르세프(Osarseph, [[모세]])가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으로 고대 로마의 역사학자였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이에 대해서 직접 '아피온에 대하여 반박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반박하기도 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