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치의학 (문단 편집) == 역사 == BC 3000년 경 이집트에서 발치와 배농을 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치통 치료제도 이때 이미 존재했다.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탈레스가 치아발생, 치아우식증(충치)와 치주병의 치료, 치아발치, 턱골절, 구강내 보철물을 사용한 기록이 있다. 18세기까지 서유럽에서는 외과술이 이발사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치과질환도도 마찬가지로 이발발치사(Barber Surgeon)에 의해 치료됐다. 근대치의학의 아버지는 프랑스인 피에르 포샤르(Pierre Fauchard, 1678~1761)이다. 그는 보철물의 발전에 앞장섰고 치열을 교정하는 술식으로 근대 치과교정을 시술한 인물이다. 치조농루라는 치조골에 농이 차는 질병이 있는데 포샤르의 이름을 따서 포샤르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728년에 ''Le Chirurgien Dentisté, ou Traite des dents''라는 근대 치의학 서적을 발간한다. 미국의 경우 1840년에 Baltimore College of Dental Surgery가 정치적인 이유로 의과대학에서 분리 설립되면서 그때 부터 학제적으로 분리되어 발전했다. 이 때 의과대학이 있는 대학에서 기초의학교육을 공동으로 받은 학교들은 D.M.D학위를, 그렇지 않은 학교들은 D.D.S학위를 수여했다고 한다. 비슷한 이유로 학교의 영문명도 School of Dental Medicine이거나 School of Dentistry이다. 추가적은 역사는 [[치과]] 참고. 한국에서는 다른 의학과 마찬가지로 민간요법이 주류였으나 1876년에 개항을 함으로써 근대적 치과치료를 시작했다. 1885년에 제중원에서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진행한 발치가 한국 근대치의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http://medhist.or.kr/upload/pdf/kjmh-11-2-117.pdf|의사학]](Medical History) 논문에 따르면, 치의학의 발전 과정에서 여러 논쟁이 있어 왔다. 그 논쟁을 통해서 구 미국에서는 윤리적 의식과 전문의식이 탄탄한 직업군이 됐지만 한국에서는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일제 강점기 직후였던지라 그럴 시간이 부족했다. 단, 이 논문은 2002년에 작성된 논문으로 이후 15년간 치과계도 많은 논쟁을 겪었고 아직 부족한 시간이지만 그 논쟁 속에서 ‘치과의사 윤리선언’을 만들어냈다. 해당 선언의 내용은 [[치과의사]]항목 참고. * [[아말감]]의 사용 : 1835년부터 1850년 사이, 20세기 후반에 아말감의 사용 금지 여부를 놓고 격한 논쟁이 있었다. * 경화 [[고무]] (Vulcanite)를 이용한 의치의 특허 : 굿이어 형제가 고무에 황을 첨가하여 실용적으로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고, 1864년~1881년 사이에 치과의사들은 경화 고무를 이용한 의치를 제작할 때마다 굿이어 형제에게 특허권료를 줘야 했다. 치과의사들이 격하게 항의했으며 치과의사 한 명이 굿이어의 대리인을 살해하기도 했다. * 국소감염설 : 1910년~1920년 사이에, 불량한 치과 보철물을 제거하여 구강 내 감염을 줄이면 원인 불명의 질병을 줄일 수 있다는 설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치과 보철물을 제거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으나, 결론적으로 이런 행동은 근거가 없고 환자에게 해로운 것으로 밝혀졌다. * 수돗물 불소화 : 1945년 수돗물에 [[플루오린]]을 첨가하면서부터 항상 반대에 시달려 오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