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치파오 (문단 편집) == 역사 ==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이 입었던 시지갼[* 한어론 창파오(長袍:장포).]이라는 옷에서 유래하였다. 원래는 말을 탈 일이 잦았던 만주족을 위해 디자인된 옷으로 기마에 편하게 자연스럽게 [[옆트임]]이 생겼다고 한다. 남녀 구분 없이 입던 옷이었으며 이것만 따로 입진 않았고 '''[[바지]]와 함께''' 입었다. 또 남성용은 허리띠까지 차는 게 정석이나 후반에 갈수록 한족 위주로 허리띠를 잘 차지 않은 모습이 다수다. 그리고 길이도 원래는 몽골의 [[델(의복)|델]]처럼 발목을 넘었다. 창파오의 소매는 청나라 초기에는 만주의 추운 겨울날씨에 맞게 폭이 좁았으나, 만주족이 [[중원]]과 남방에 정착하면서 온화한 기후에 맞게 점차 폭이 넓어져갔다.[*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청나라]] 시절 [[변발]]과 함께 강요된 문물 가운데 하나로 청나라의 만주족은 한족들과 달리 한푸를 입는 게 공식적으로 금기시되지 않았고 한족들 또한 [[도사]] 한정으로 청나라 때도 여전히 한푸를 입었으므로 한푸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중화권 사극]]을 보면 청나라 초기가 배경인 사극들은 창파오의 소매가 하나같이 좁은 반면, 청나라 중기 이후가 배경인 사극들은 한푸만큼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소매 폭이 넓은 창파오가 많이 나온다. [[파일:external/emulall.net/90e4158c3a409709b14e08ef0dd31b2a_1376500296.08.png]] [[월화의 검사]]에 등장하는 [[이열화]]. 청나라 사람이다. 청 말기부터 [[중화민국]] 시절에 서양 의복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였다. 반소매나 [[민소매]] 스타일의 치파오는 [[신해혁명]] 이후 서양 복식에 영향을 받아 생긴 디자인이다. 이 치파오는 신해혁명 이후 서구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상하이 외국인 조계 지역 [[카바레]]에서 여종업원들이 즐겨 입던 의상이 원류가 되었다고 한다.[* 장만옥과 양조위가 주연한 [[화양연화]]가 정확히 당시 분위기를 반영한다.] 많은 이들이 치파오를 중국 전통의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히려 [[당나라]] 때 입었던 당복(唐服)이나 [[명나라]] 때 입었던 명복(明服)이 한족의 전통 의상에 가깝다. [[한푸]](漢服)라고 하는데 자세한 설명은 해당 항목을 참고. 그래서 중국의 한족주의자들은 치파오 대신에 일부러 한복(漢服) 당복 혹은 명복 및 한푸를 패션쇼 등에서 강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주족이 아닌 한족의 전통의상을 강조하는 경향은 최근에 생긴 것이다. [[장쭝창]]이나 [[쑨촨팡]]같은 보수적인 [[군벌/중화민국|중화민국]]의 [[군벌]]들은 변형된 치파오가 서구의 퇴폐적인 풍속을 물려받은 문란한 옷이라 하여 싫어해 자신의 통치구역에서 [[빨갱이]]들의 머리스타일이라 생각한 단발머리와 더불어 금지했다. 개량 치파오 자체가 근대 서양 드레스 영향을 받아 몸매를 강조하고, [[여성]]의 [[노출]]이 많은 옷인데다 [[유흥업소]]의 [[매춘부]]들이 입던 옷이 대중적으로 유행한 것이니 당시에 문란하다고 여긴 것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 현재도 국가를 불문하고 몇몇 매춘부들은 일할때 치파오나 치파오 형태의 드레스를 입곤 하기에 치파오=문란하다 라는 인식이 생긴 것으로 보면 된다. 반청, 한족주의적 성격을 띤 신해혁명 직후에도 중국인들은 치파오를 계속 발전시켰다. 그리고 현대 중국은 개혁개방 후 국제적인 이미지상으로도 치파오를 더 밀어주었다. [[이소룡]]이 입었던 것으로 유명한 탕좡도 역시 만주족 의상 마과를 개량시킨 것이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해진 현재는 점차 한푸를 미는 추세이며 여러가지로 개량도 가하고 있다.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cartoon&no=489111|만화로 보는 치파오(후방주의)]] [[이집트인]]들이 입는 갈라베야와 비슷한 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원래 이집트인들은 로인클로스나 드레이퍼리라고 해서 지금은 입지 않는 고유의 의복문화가 있었다. 그런데 [[아랍]]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아랍인]]이 입던 옷에서 유래된 갈라베야를 스스로의 의복문화로 받아들였는데 이게 중국과 상황이 비슷하다. 중국이나 이집트나 옷의 생김새도 비슷하고 [[이집트인|농경]], [[한족|정착생활]]을 하던 민족이 [[아랍인|유목민족]]과 [[만주족|반농반목 민족]]의 의복문화를 수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파일:attachment/f0031668_4f2537dbcd07a.jpg]] 중화민국 시절에 치파오를 현대에 맞게 여러가지로 개량하고 활용하는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교복]]인데 국민 교복(!)으로 치파오를 개량한 민국학생장(民國學生裝)이 있다. 이 외에 [[제복]]과 치파오의 퓨전이나 규정은 상관없이 집에서 치파오를 입고 나오면 교복으로 치는 곳도 있었다. 지금도 유니폼 등으로 치파오의 개량 및 활용은 끊임없지만 너무 앞서나간 경우엔 [[SF]] 제복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문화대혁명/악영향|치파오 역시 사구(四旧, 없어져야 할 낡은 네 가지)라며 탄압받는 대상이었다.]] [[류사오치]]의 부인 [[왕광메이]]도 외국 순방 때 치파오를 입었다는 이유로 혁명의 죄인이 되어 [[홍위병]]들에게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현재 국내외를 막론하고 고급 중식당에서는 치파오를 입은 직원이 서빙을 하는 경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