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치하 (문단 편집) === 치하 개량형 === || [[파일:USSR_Captured_Shinhoto_Chi_ha.png|width=100%]] || || '''九七式中戦車 チハ 改''' || '''"치하 개량형 (チハ 改)"''' 혹은 '''"신포탑 치하 (新砲塔 チハ)"'''는 기존 치하의 97식 57mm 전차포가 대전차전에서 매우 취약함을 확인, 따라서 [[1식 기동 47mm 속사포]]를 전차포로 개수한 1식 전차포를 장착하여 만들어낸 치하의 개량형이다. 신포탑 치하가 등장한 사정은 이러했는데, 기존의 치하는 [[스튜어트 전차]]에게 밀리는 성능으로, 개전 후 필리핀 전장에서 노획한 [[미군]]의 M3 스튜어트의 장갑 성능을 시험할 때 일본군의 전차포가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 당시 일본군 지휘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스튜어트가 전면 장갑이 50mm나 되는 등 경전차치고는 뛰어난 장갑을 지닌 전차이기는 했지만, 유럽에서는 경전차인 것이 태평양 전선에서는 주력전차들의 주포로 전면장갑을 뚫을 수 없다는 점에서, 할힌골 전투 이후 2년만에 일본 전차가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줬다. 1942년 4월 버마 랑군에서 노획한 M3 스튜어트 경전차에 대한 사격에서 매우 충격적인 결과를 보였는데, 스튜어트는 포방패까지 포함하면 51mm 수준이지만 대부분 전면 장갑은 38mm였다. 치하로 300m 밖에서 이 부위를 집중적으로 타격했으나 관통은 실패했다. 그렇다고 측면으로 돌아가서 사격하는 고난이도 기술을 적용하려고 해도 격파가 불가능했다. 스튜어트의 25mm 측면장갑에 300m 밖에서 쏘았지만 관통이 불가능했으며, 측면에서 거리 200m, 거리 100m의 실험이 모조리 관통불가 판정이 난 후,[* 사실 100m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영거리 사격]]에 가까운 거리에서 치하 3~5량이 집중사격한 결과, 간신히 장갑에 균열을 내었다고 한다. 이런 작태를 보고받은 일본 육군 상층부에서는 치하를 개량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미쓰비시 사에서는 그에 응답하여 할힌골 전투 때 노획한 [[BT 전차#s-5.3.2|BT-7 1937년형]]의 원뿔형 포탑을 참고하며 연구 끝에 1식 기동 47mm 속사포를 장착한 "치하 개량형"이라는 명칭으로 신형을 개발하게 된다. 전반적으로는 1식 전차포의 크기 때문에 포탑이 대형화 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존 전차장-포수 2명에서 탄약수가 커진 포탑에 추가로 탑승해 전투 효율은 기본형 치하에 비하여 상승했다. 하지만, 포탑이 기본형 치하보다 커졌기 때문에 전방 기관총 사수가 전차 외부에서 탑승가능한 해치가 제거되었다. 1942년 4월 3일 12시 정각, 신형 치하의 시험이 시작되었는데, 우선 첫번째는 이전의 97식 57mm 전차포로 파괴 불가능이었던 M3 스튜어트에 대해 실시된 사격 시험에서는 1,000m 거리에서 명중한 47mm 전차포탄 6발 중 3발이 전면장갑을 관통, 800m 거리에서는 9발 중 6발이 전면장갑을 관통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이렇게 제작된 치하 개량형은 1942년 코레히도르 전투 당시 이전에 노획한 스튜어트와 함께 코레히도르 섬 상륙을 시작으로 실전을 치룬 후, 이 때 당시는 보급이 빈약한 영국군과 미군을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사실 당시의 미군은 포위된 상태인데다가 코레히도르 전투 당시에 주둔 중이었던 인력 및 보급물자도 맥아더의 실책으로 바탄 반도에서 손실하는 등 미군의 상태는 좋지 못하였다.] 결론적으로는 복합적인 원인으로 신포탑 치하의 데뷔전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일본군 상층부도 이 성능에 만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