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라칼라 (문단 편집) === 부정적 평가 === > '''안토니누스는 세 종족에 모두 속했다. 그리고 그는 미덕을 전혀 가지지 않았고, 그들의 모든 악덕을 모두 결합해 가지고 있었다. 갈리아인들의 변덕스러움과 비겁함, 아프리카인[* 오늘날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의 가혹함과 잔혹함, 시리아인의 교활함.''' >----- > [[디오 카시우스]] > '''이것(카라칼라의 최후)이 삶 자체가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고, 그의 치세는 굴욕적으로 참기만 했던 로마인들에 대한 비난까지 불러온 폭군의 최후이다.''' >----- > [[에드워드 기번]] > '''그는 부도덕하고 잔인했던 아버지보다도 더 잔혹했다. 그는 식탐이 있고 포도주에 중독되었다. 식솔들은 그를 싫어했으며 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군사도 그를 혐오했다. 그와 동생 게타는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 >----- >《로마 황제 열전》중 카라칼라의 생애, 9 고대부터 지금까지 카라칼라는 로마의 [[폭군]]이라고도 공인된 만큼 평가가 상당히 나쁘다. 당대 기록부터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역사책들을 보면, 한결같이 '''아주 잔인하고 난폭하며, 로마의 포악한 황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카라칼라는 [[콤모두스]] 황제와 함께 능력이 보장되지 않는 부자 세습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제시되는 황제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안토니누스 칙령이 후대에 민주적이고 평등하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카라칼라 본인은 생애 전반에서 보여지듯 전혀 민주적인 황제가 아니었고, [[헬레니즘]]적인 [[세계시민주의]]에 심취한 사람도 아니었다. 당대 원로원 핵심 의원이자 황제들과 직접 면담을 할 수 있던 디오 카시우스의 지적에 따르면, 안토니누스 법으로 시민권을 확대한 이유가 공공 의무를 확대하고 황실 재원을 늘리기 위해서였고, 혜택을 받았을 것 같은 속주민들은 유례없는 수탈로 신음해 민생마저 고통받게 됐다. 에드워드 기번으로 대표되는 카라칼라를 단죄하는 학자들은 카라칼라가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적인 이유 등을 내세워 시민권 확대라는 명분으로 발표한 법령 하나가 무너져 내려가던 로마 제국을 사회 전반적으로 위기로 빠뜨리게 만든, 미래를 생각도 하지 않은 최대 실책으로 평가한다. 카라칼라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리스를 통일하고 젊은 나이에 대제국을 만든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존경했다. 그는 대왕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고, 자신의 우상이 했다고 전해지는 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카라칼라는 대왕처럼 자기 과시와 야망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지만, 개인적인 매력은 전혀 없었고 독불장군처럼 행동했으며, 제 손으로 동생을 죽일 정도로 잔인성과 폭력성을 갖춰 자기절제와 분노 조절 등이 상당히 부족하다고 평가받았다. 또 아버지처럼 지나치게 원로원의 위상을 낮추고, 선군정치를 펼치면서 원로원과 민중 등 많은 이들에게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동생 게타를 제 손으로 직접 찔러 죽이고, 동생의 친구들과 죄없는 로마 시민 2만여 명을 마구잡이로 죽인 이후, 군대의 급여를 2배나 인상했으며 홀로 고립되게 된 로마를 떠나 병사들과 함께 먹고 행군을 하며 전투을 치뤘다. 따라서 암살 직전 그는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에게는 최악의 폭군이라고 평가받았는데, 장군 등 장교급 인사들을 제외한 일반 군인들에게는 분명히 인기가 있었던 황제였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실책은 아무리 카라칼라가 나름 정치에 관심있어 했던 모습을 보이고, 재판에도 나름 성실히 임했다고 변호해도 가리기 어려웠다. 카라칼라가 공동황제였던 동생 게타를 살해한 이후, 2만여 명을 재판 없이 살해하면서 본국 이탈리아와 일반 로마 시민들에게 그는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양심없는 폭군이 됐고, 군을 제외한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다. 이에 그는 동생을 살해한 직후, 군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까지 올려줬는데 이런 행동은 아슬아슬하게 안정된 국고를 순식간에 고갈시켰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생전부터 상속세, 노예 해방세를 두 배나 인상시키고 무리하게 세금을 인상시켜 폭정을 한다고 비난받았다. 또 동방에서의 외교 실패,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것 등으로 제국 동방에서의 인기는 최악이 됐고, 비무장 상태의 알렉산드리아의 청년들이 자신에게 항의했다고 무고한 민중들과 함께 잔인하게 학살한 행동은 제국 전체로 퍼져나가 폭군으로 공인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카라칼라는 기이하고 [[독불장군]] 같은 언행을 하면서 늘 적을 많이 만들었고, 자신에게 조금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면 제아무리 비무장의 시민이라고 하더라도 자비를 베풀지 않고, 모조리 학살하는 괴행태를 저질러 당대에 이미 콤모두스 못지 않은 폭군으로 공인돼 기록됐다. 또한 카라칼라는 이전 시대의 [[네로]]처럼 후세에 폭군이라고 까이고 있음에도, 민중들에게 유쾌하고 재기발랄하며 매력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다만 카라칼라의 유년 시절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의 그는 매력적이고 영리하며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친구들에게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년기때 그는 민중들에게 사랑받았고, 원로원 의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으며 사람들의 애정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의 장점들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카라칼라는 글에서도, "친절한 행위에서도 뒤쳐지지 않는 듯 보였고, 남에게 베푸는 데도 전혀 인색하지 않았으며 용서할 때에도 마지못해 하는 적이 없었다."[* 《로마 황제 열전》중 <카라칼라의 생애> 1]는 좋은 기록들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10대 초반의 카라칼라의 모습이었으며, 이후 그의 행동과 발언, 주변의 기록들을 보면 완전히 뒤집어진다. 부족한 자기 통제력 탓에 돌발적인 충동 제어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닮고자 했던 노력과는 무관하게 제국 통치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동생을 죽인 죄책감 탓에 발기 자체가 안 되는 성불구자가 되어 자식도 남기지 못하게 되고 만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확연하기도 하고 은밀하기도 한 고통 때문에 몸이 아팠을 뿐 아니라, 어떤 괴로운 환영으로 고통을 받아 마음까지 병들었으며, 종종 자신이 칼을 든 아버지와 동생에게 쫒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다. 실제로 [[게타]]를 죽인 것도 그가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의 극단적인 불안이 그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 야사에 의하면 카라칼라는 죽기 직전에 [[아버지]]가 나타나서 "네가 동생을 죽였으니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로마를 떠나서 군대에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해했다. 카라칼라는 몸이 아파서 신전에서 질병 치유를 기원하기도 했지만 사실 카라칼라를 가장 괴롭힌 것은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죄의식과 불안감이었고 대순방 기간 동안 발생한 알렉산드리아 대학살 같은 잔인무도한 행동 뒤에는 이러한 원인이 숨어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