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라칼라 (문단 편집) === 장인과 아내 살해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생전, 카라칼라는 아버지의 동향친구이자 할머니의 조카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Gaius Fulvius Plautianus)의 딸인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Publia Fulvia Plautilla)와 결혼했다. 하지만 카라칼라의 장인 플라우티아누스는 근위대장인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온갖 비열하고 잔인한 행동과 악행, 폭력 등으로 사람들의 신망을 얻지 못한 위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무사했는데, 이는 카라칼라의 아버지 세베루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조상을 뒀고,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 출신인 동향친구, 그것도 외사촌 사이인 플라우티아누스를 무척 아꼈으며 서로 연인사이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우정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는 그의 비리와 악행들을 눈감아주고, 아내 돔나와 동등한 수준의 각종 혜택을 제공했다. 덕분에 플라우티아누스는 막대한 권력과 부를 얻었고, 그 위세는 대단했다. 카라칼라는 이 결혼을 반기지 않았고, 장차 황제가 될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될 장인과 아내 모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대 사람으로 원로원 의원인 디오 카시우스는 이에 관해, 자신의 일기 형식으로 기술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형 게타 죽음 이후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플라우티아누스의 이러한 행동 대부분은 세베루스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사실은) 알고도 모르는 척 했다. 그렇기에 그(세베루스)의 형 게타(카라칼라-게타 형제의 큰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플라우티아누스에 대한 모든 사실을 그에게 밝혔을 때, 게타는 근위대장을 미워하고 더 이상 그(플라우티아누스)를 두려워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는 형의 동상을 포룸에 세웠고 그는 영예를 지킬 수 있었다. 헌데 이것 때문에 (플라우티아누스는) 그 대부분 권한이 박탈됐다. 따라서 플라우티아누스는 매우 분개했다. 그는 이전에도 자신의 딸을 무시하는 안토니누스(카라칼라)를 미워했지만, 지금은 그에게까지 무시가 계속되자 책임의 원인을 제공한 안토니누스를 그 어느 때보다 싫어했고, 그에게 다소 가혹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안토니누스는 가장 뻔뻔한 존재인 자신의 아내에게 혐오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의 모든 일에 계속 간섭하고 모든 일에 대해 책망함에 대해 원한을 느꼈다." >----- >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베수비오산|베수비오 화산]] 폭발과 플라우티아누스 몰락 중 일부>''' 디오의 지적처럼 카라칼라에게 자신의 큰아버지가 죽기 전, 현직 황제인 자신과 아버지에게 플라우티아누스에 대한 두려움을 밝히며, 현직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가 외사촌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한 유언은 꽤나 인상적으로 다가왔고 이는 그가 아내와 장인을 극도로 혐오한 이유가 됐다. 더군다나 플라우티아누스는 세베루스 황제의 형 게타의 폭로 이후, 그 증오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카라칼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율리아 돔나의 시종들까지 협박하고 감시해 백부의 죽음 이후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카라칼라에게 큰 원한을 샀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니, 그는 202년 4월 결혼식을 올린 이후 아내와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려고 했으며,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결혼 생활 중 204년 딸을 한 명 얻었다. 그러나 이후 기록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딸의 언급이 없는 것을 봤을 때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놓고 다툰 카라칼라와 플라우티아누스 부녀의 갈등은 205년 1월 22일에 극도로 악화되었다. 사료마다 다르지만 이들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카라칼라가 평소 그들을 죽여버리겠다고 일갈한 발언이 플라우티아누스의 귀에 직접 들어가면서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세베루스 황제가 들은 형 게타의 유언, 플라우티아누스의 게타 동상 철거 요구, 율리아 돔나와 플라우티아누스 사이의 갈등이 터지면서 황실 내부의 암투로 심화됐다고 전해지는데, 어느 쪽이 진실이던 간에 플라우티아누스 쪽은 카라칼라를 없앨 계획을 세웠고, 카라칼라 역시 처가 전체를 몰살시키려고 명을 내렸다. 플라우티아누스 일가 몰살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의 시작은 두 가지 버전이 전해진다. 어느 설명에 의하면, 카라칼라가 세 명의 백인대장을 설득하여 플라우티아누스를 음해하는 거짓 정보를 보고하게 했다. 그들은 조상들을 위한 축제가 끝난 후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저녁 식사 직전에 세베루스 황제에게 가서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들과 다른 일곱 명의 백인대장들에게 세베루스와 카라칼라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가 음모를 통해 '''원수보다 더 원수 같은''' 사위 카라칼라의 제위 계승을 막고 자신이 제국을 장악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세운 계획은 황제와 황태자를 살해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 곧바로 그 사실을 알리면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플라우티아누스는 아들과 함께 황궁에 비무장 상태로 왔다가 체포돼 즉시 교살됐다. 이후 카라칼라는 장모, 처남의 아내와 그들의 어린 딸[* 플라우티아누스의 손녀]까지 모조리 추방한 다음 죽였다고 한다.[* 고대기록 주장과 달리, 카라칼라가 장모, 처남의 남은 일가까지 모조리 죽인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베루스 시대의 여러 비문과 디오의 주장에서 확인되는데, 카라칼라의 명령으로 체포 즉시 교살된 이는 플라우티아누스와 그 장남이었고, 다른 가족들은 세베루스와 돔나의 명령으로 시칠리아로 추방되는 선에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아울러 카라칼라는 플라우티아누스 부자의 초상화들을 모조리 파괴하도록 하고, 장인과 처남의 시신을 거리에 내팽개치도록 하여 조리돌림식으로 민중의 야유를 받게 했다. 205년 1월, 카라칼라는 죽은 플라우티아누스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플라우틸라를 리파리 섬으로 추방했다. 이때 그는 아내와 이혼한 뒤 아예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플라우틸라 편을 들면서 만류해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카라칼라의 아내이자 세베루스의 며느리인 그녀는 처형되지 않았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장인과 아내를 굉장히 혐오했던 카라칼라의 증오는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카라칼라는 아버지가 죽은 211년 2월 제위에 오른 뒤 동생 게타를 1년도 못 되어 살해한 다음 사람을 보내 추방시킨 아내를 죽여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