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미실리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시리아 카미실로.jpg|width=660]] 1960년대의 카미실리 본래 누사이빈의 외곽 지역이었으나 1920년경 [[오스만 제국]]의 학살을 피해 이주한 [[아시리아인]]들이 정착하며 도시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시리아어로 '갈대 집'이란 뜻인 베트 잘린이라 불렀으나, 얼마후 유입된 쿠르드인들이 인구상 우위를 차지한 후 쿠르드어로 같은 의미를 지닌 카미실로가 보편화되었다. 오스만-독일 당국의 노력에도 1918년 기준 누사이빈에서 멈춰 있던 바그다드 철도는 프랑스 당국의 관할 하에 공사가 재개되어 1926년 카미실로 역이 세워졌고, 이로써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40년, 이라크 [[키르쿠크]] 부분을 마지막으로 바그다드 철도가 완공되자 카미실리는 그 중간 기착지로써 중시되었다. 한편 도시 개발을 주도한 것은 [[디야르바크르]] 출신의 아시리아인 난민 마수드 아스파르와 이복형제가 세운 아스파르 & 나지르 회사로, 밀 판매로 축적한 자금으로 학교 / 병원 / 교회 등의 기간 시설을 세웠다. 또한 비슷한 처지이던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 역시 정착하였다. 이후로도 카미실리 주민의 대부분은 아시리아 인이었다. 1939년 프랑스 당국에 의하면 3만이 좀 넘는 인구는 아시리아인 1만 4천, 아랍인 8천, 쿠르드인 6천, 아르메니아인 3천 5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50년대 들어 아시리아계는 주민의 2/3을 이루었다. 하지만 60-70년대 [[바트당]] 정권은 사회주의 경제란 명목 하에 아시리아인 소유의 농장, 토지, 건물 등의 부동 자산을 압수하였다. 이로써 많은 아시리아 인이 해외로 망명하였고, 80년대 들어서는 쿠르드계가 다수가 되었다. 다만 시리아 정부는 인구 집계에 있어 쿠르드인을 다수 제외시켜 시민권이 없이 '비국민' 취급받는 주민이 늘었고, 이로써 반정부 기류가 팽배해졌다. 또한 아사드 정권은 카미실리 등 국경 도시들에 아랍인들을 이주시켰고, 이로써 민족 갈등은 점차 첨예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