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테나치오 (문단 편집) === 1960년대 === 사실 최후방에 [[리베로]]를 두는 전술 자체는 1940년대 말 [[살레르니타나]]의 [[주세페 비아니]]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는 카테나치오 전술의 시초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 카테나치오가 제대로 정립되기 시작한 때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이 [[펠레]]와 [[가린샤]]라는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 두 명을 가지고 4-2-4 전술을 통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랐을 때였다. 브라질같은 남미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개인기가 약한 유럽은 브라질에게 엄청나게 고전하였고, 그들을 막기 위해 수비적인 전술들이 고안되기 시작하였다. 비아니 감독이 고안한 카테나치오 전술을 바탕으로 [[트리에스티나]]의 감독을 맡은 [[네레오 로코]]는 트리에스티나를 [[세리에 A]] 2위까지 끌어올리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footballuser.com/1301014_AC_Milan.jpg|width=100%]]}}} || || {{{#000000 [* 이미지에 오타가 있는데, [[조제 알타피니]]는 알파티니로,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트리파토니로 적혀있다.] }}} || 네레오 로코 감독의 카테나치오 전술은 당시의 일반적인 리베로를 두는 전술과는 달랐다. 비아니의 전술과 같은 당시의 일반적인 리베로 전술은 리베로 앞에 3명의 수비수를 두는 형태였지만, 로코 감독은 이에 멈추지 않고 아예 팀의 미드필더 [[조반니 트라파토니]][* 훗날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감독직을 맡는다.]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배치하여 수비 상황시 실질적으로 '''리베로 앞에 4명의 수비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협력 수비력과 커버링 실력을 가진 베테랑 수비수 [[체사레 말디니]][* 그 [[파올로 말디니]]의 아버지이다.]에게 리베로 역할을 맡겼다. 또한 중원 역시 당시 세계 축구를 호령하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미드필더 [[디노 사니]]에게 볼란테 역할을 맡겼다. 하지만 이 밀란의 전술이 무작정 수비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AC 밀란의 레전드 [[잔니 리베라]]가 전방의 3톱[* 그 3톱의 한 명인 [[조세 알타피니]]는 당대 최고의 골잡이 중 한 명이었다.]을 보조하면서 공격하는 시스템이라 무시무시한 역습이 이어지게 되었고,[* 참고로 이 전술의 경우 수비하는 선수의 수가 많아서 공격하는 선수의 숫자가 적어 상대적으로 리베라의 역할이 막중하였는데, '''리베라는 그 임무를 완수해냈다.''' 말 그대로 [[판타지스타]].] 이로서 1962/63 시즌, 1968/69 시즌 유러피언컵(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들어올리는 밀란의 최초의 전성기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AC 밀란]]의 지역 라이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감독 [[엘레니오 에레라]] 역시 자신의 팀에 카테나치오를 정착시키기 시작하였다.[* 스페인 출신의 그는 스페인의 공격 축구 전술을 밀었지만, 카테나치오한데 밀려버리고 결국 AC 밀란처럼 카테나치오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에레라의 카테나치오는 밀란의 그것과는 달랐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JYEwTG.jpg|width=100%]]}}} ||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의 카테나치오는 당시의 일반적인 리베로 전술처럼 리베로 앞에 3명의 수비수를 놓되, 2명의 선수를 전술의 핵심으로 이용했다. [[자친토 파케티]][* 당시 인테르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와 [[자이르 다 코스타|자이르]]이다. 자친토 파케티는 수비뿐 아니라 공격에도 재능이 있어, '''오버래핑을 시도해 엄청난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1955/56 시즌에는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자친토 파케티는 현대 풀백 오버래핑의 시초이자 현대 풀백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따라서 인테르는 공수의 유연성을 맞출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가린샤, 펠레 등의 괴물들에게 밀렸지만, 그래도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오른쪽 윙어 자이르에게 윙어로써 공격을 하되, 수비가담을 중요시하였다. 많은 활동량과 좋은 수비력을 필요로 하였지만 자이르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냈다. 이로서 인테르는 수비시에 빠르게 5백으로 전환이 가능하였다. 또한 파케티의 오버래핑이 이어지면, 왼쪽 윙어 자리에 서던 [[마리오 코르소]]가 바르셀로나에서 온 [[루이스 수아레스(스페인)|루이스 수아레스]][* 스페인 최초의 발롱도르 수상자로 우루과이의 루이스 수아레스와는 동명이인.]의 플레이메이킹을 도와주었고, 거기에 [[산드로 마촐라]]가 [[판타지스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이 결과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 역시 [[AC 밀란]]과 더불어 전성기를 가지게 되고[* 당시 라 그랑데 인테르(la grande inter)라 불리우며 la grande 호칭을 받은 유이한 팀이다. (나머지 하나는 토리노)], 세리에 A와 유러피언컵을 우승하였다. 이렇게 같은 시기에 [[AC 밀란|같은 지역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라이벌 팀]]이 비슷한 전술을 가지고 똑같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런 카테나치오 전술은 유럽에서 엄청난 효과를 몰게 되고, 이 카테나치오 전술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까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 카테나치오 전술은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어느 한 천재]]'''가 이끄는 [[토탈 풋볼]]에 의해 1970년대 사장되기 시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