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끼리 (문단 편집) === 역사 속의 기록 === [[힌두교]]에서는 가장 숭앙받는 신 중의 하나인 지혜의 신 '''[[가네샤]]'''가 코끼리 머리를 하고 있을 정도로 대접이 좋다.[* [[하마]]는 각지에서 악마의 상징으로 꼽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불교]]에서도 성스러운 동물로 대접받는다. 특히 흰 코끼리는 가장 성스러운 동물로 대접받는데, [[석가모니]]가 태어나기 전에 [[마야부인]]이 여섯 개의 상아가 달린 흰 코끼리가 겨드랑이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는 전승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동물은 코끼리, 식물은 [[연꽃]]이라고 할 만하다. 석가모니 부처를 가리켜 '''상왕(象王)'''이라고 부르는 단어도 여기서 비롯된 것. 국내에 있는 몇몇 절에서도 코끼리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불교 국가인 [[태국]]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뿐 아니라 나무를 하면 무거운 통나무를 코로 감아 운반해주고, 먼 거리에 짐을 싣고 이동할 때나 농사를 지을 때 길들인 야생 코끼리가 유용하게 쓰였다고 한다. 아기를 가진 여성이 코끼리 배 밑을 세 번 지나가면 순산한다는 속설도 있다. 현대에도 흰 코끼리는 왕실에서만 키울 수 있으며, 사람 이상의 대우를 받기도 한다. 물론 보통 코끼리는 부림소처럼 일을 하지만 일반 코끼리도 대우가 상당히 좋은 편이다. 다만 [[태국 국왕|태국 왕실]]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왕이 흰 코끼리를 하사하겠다고 "선언"해 신하를 엿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본 문서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코끼리라는 동물이 사료부터 시작해서 관리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닌 데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존귀한 흰 코끼리는 최상급의 먹이를 주고 호화찬란한 마굿간을 지어 모셔야 한다. 고로 흰 코끼리를 받는다면 파산 확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왕이 하사한 것을 거절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하사 받은 신하 입장에서는 엄청난 폭탄이 된다. 이 때문에 흰 코끼리를 받게 된 신하들은 가지고 갈 수 있는 재산을 챙겨 [[야반도주]]하는 게 상례였고, 애초에 왕이 흰 코끼리를 하사하는 목적 자체가 이런 식으로 마음에 안 드는 신하를 추방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영어의 'white elephant'라는 [[관용구]]가 나왔다. 체면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실익은 없고 비용만 많이 드는 [[애물단지]]를 가리킨다. 현재 [[중국]]과 [[미얀마]]와 [[라오스]] 접경 지역엔 아직도 소수의 [[아시아코끼리]]가 있다. 사실 이전에 아시아코끼리의 아종인 중국코끼리가 예전에는 [[물소]], [[코뿔소]], [[양쯔강악어]]와 함께 [[황하]]와 [[장강]] 유역 일대를 비롯한 중국 남부 지역에 살았었는데, 그 지역이 많은 강수량과 아열대 내지 열대성 기후 덕분에 습지가 많은 온대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象) 자는 코끼리의 모습에서 따온 [[갑골 문자]]가 그 기원이다[* 해당 한자의 [[상고한어]] 발음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해당 한자가 犅(수소 강)과 동계어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상아]]로 만든 유물이 묘지에서 발굴되기도 하지만, [[상나라]] 시대의 상아 유물은 매우 희귀하다. 사냥으로 중국코끼리의 개체수가 줄다 결국 사라진 걸로 보인다.[* 이미 인류는 수만 년 전부터 [[매머드]]를 사냥하며 이동했다. 당시 중국의 기술 수준으로 잡는 건 충분하고도 넘쳤다.] 하지만 살아있는 코끼리의 모습을 생생하게 주조한 기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상나라]] 시대의 사람들은 코끼리를 실제로 보았고 잘 관찰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파일:external/image.cn.made-in-china.com/%E9%9D%92%E9%93%9C%E5%99%A8%EF%BC%8D%E8%B1%A1%E5%B0%8A.jpg|width=200]] || [[파일:external/file.gucn.com/44B7BAI27610F194BK.jpg|width=200]] || [[파일:external/www.qingdaomuseum.com/4-%E9%93%9C%E8%B1%A1%E5%B0%8A.jpg|width=200]] || ||<:> [[상나라]] 상준 ||<:> [[주나라]] 상준 ||<:> [[청나라]] 상준[* 묘사가 다시 사실적이 되었는데, [[한나라]] 시기 들어서면서 인도와 서역과 교류하면서 코끼리를 데려오고 [[명나라]] 때도 [[정화]]가 아프리카에서 기린과 코끼리를 데려온 기록이 있고, [[청나라]] 시기에도 서양과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코끼리가 수입되었다. [[열하일기]]에도 청 황실에서 기르는 코끼리를 본 기록이 있다.] || || [[파일:경모궁(景慕宮) 의궤(儀軌) 상준(象尊).jpg|width=200]] || [[파일:external/blog.joinsmsn.com/a7acf1b2bebab3c54348682146af2cfb.jpg|width=200]] || [[파일:external/blog.joinsmsn.com/3e89a8c522bcf08d11f8bc24e0db68e4.jpg|width=200]] || ||<:> [[경모궁]]의궤에 실린 상준 그림 ||<:> 세종실록 오례의 제기도설에 실린 상준(오른쪽) ||<:> 조선시대 민간에서 사용한 상준(오른쪽) || 또 동아시아권에서는 코끼리의 모습을 본딴 술을 담는 제사 그릇이 있어 종종 출토되기도 하는데, 이를 '상준(象尊)[* 보통 이 뒤쪽 한자는 높을 '존'으로 읽지만 상준에서는 '존'이 아니라 '준'으로 읽어야 한다. 尊은 술을 담는 제사 그릇을 본뜬 한자이고, 사람 이름이나 그릇의 뜻으로 쓸 때는 '준'으로 읽는다. 尊에서 갈라져나가 만들어진 [[형성자]]가 '술통 준'(樽)이며, 그래서 '상준'도 '象樽'으로 표기하기도 한다.]'이라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하였다. 현재까지도 일부 중종이나 종묘제례 시 사용한다. 잘 보면 중국 [[상나라]] 시기의 상준과 [[주나라]] 시대의 상준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상나라 시대 상준은 대단히 화려하면서도 실제 코끼리 모습을 잘 살린 데 비해 주나라의 상준은 코끼리의 형태보다는 [[돼지]]나 [[멧돼지]]를 더 닮았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를 상나라 시절에는 중국에서는 코끼리들이 융성했지만, 주나라 시기에는 중국에서 코끼리가 대부분 사라진 뒤라 모습이 한결 추상적인 형태로 변모했다고 본다. 또한 위(爲) 자는 본래 코끼리의 코를 손으로 잡아당겨 일을 시키는 모습의 [[갑골 문자]]가 기원이다. [[여씨춘추]]에는 [[동이]]의 상인이 코끼리를 길들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고, 제왕세기에서는 [[순(삼황오제)|순]]임금이 죽고 난 뒤, 코끼리 무리가 무덤 주변의 밭을 갈았다는 기록이 있다. [[좌전]]에는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의 소왕(昭王)이 코끼리의 꼬리에 불을 지펴, 성난 코끼리가 [[오나라]](吳) 군대의 진지를 망쳐 전과를 거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장기(보드 게임)|장기]]에도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 있는데, 장기말 중 '상(象)'은 상병, 즉 코끼리를 타고 싸우는 부대를 의미한다. 하지만 당대의 생산력도 그렇고, 현대에도 코끼리를 길들이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코끼리의 수효도 매우 적었을 것이며, 대부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여러 단서들이 일러주고 있듯 점차 중국의 기후가 밀림 환경을 벗어나 건조해지고 농경이 확산되면서 숲이 사라져서 코끼리는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게 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좌전의 기록처럼 [[초(춘추전국시대)|초]], [[오(춘추시대)|오]] 등의 [[강남(중국)|강남]] 지방에서만 코끼리의 기록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전국시대]]의 사상가 [[한비자]]는 자신의 저술 중 《해로(解老)》 편에서 "사람들이 산 코끼리를 보기 힘들게 되자 죽은 코끼리의 뼈를 구해, 그림을 그려 산 모습을 떠올려보곤 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뜻으로 생각하는 것을 모두 '상(象)'[* 오늘날까지 쓰이는 한자어 [[상상]] 역시 여기에서 유래했다. 다만 화석으로 복원도를 그리는 것은 상상보다도 [[추측]]에 가깝다.]이라 말한다."[* 「人希見生象也,而得死象之骨,案其圖以想其生也,故諸人之所以意想者皆謂之象也。」]라고 언급하고 있어, 진나라 시기에 오면 살아 있는 코끼리를 보는 일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극히 희귀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서]] 무제기에는 [[한무제]]가 남방에서 길들인 코끼리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동한의 [[설문해자]]에는 코끼리를 [[남월]] 지방의 큰 짐승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한나라]] 시대에는 이미 강남에서조차 코끼리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도 코끼리가 아예 없지는 않았는지 [[후한]] 말엽 [[조조]]의 아들 [[조충]]이, [[손권]]이 선물로 보낸 코끼리의 몸무게를 재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남북조시대]] 즈음 되면 코끼리를 보는 것 자체가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겨질 정도로 희귀해진다. [[자치통감]]에는 남북조시대 당시 [[동위]]의 영토였던 [[안후이성]]에서 코끼리가 포획되는 일이 있었고, 그걸 기념해서 원상(元象)으로 연호를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원나라]] 때 [[쿠빌라이 칸]]은 재위 말년 요동 지역에서 일어난 동방 3왕가[* [[칭기즈 칸]]의 세 동생인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의 후손들로 요동 지역에 영지를 하사받아서 '동방 3왕가'라고 불렸다. 이 전쟁의 여파로 일어난 게 [[충렬왕]] 때 일어난 [[카다안의 침입]].]의 반란 진압을 위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출전했는데, 이 때 4마리의 코끼리 등에 메단 가마에 타고 전투를 지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외에 명-청 교체기에 군벌 [[오삼계]]가 45마리의 코끼리로 이루어진 코끼리 부대를 갖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는 그가 [[미얀마]] 원정시 획득한 코끼리로 추측된다. 당시는 이미 중국 대부분 지역에서 코끼리가 완전히 사라지고도 남았을 시기니 현재는 운남성과 [[미얀마]], [[라오스]] 사이의 국경지대에 약간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중국에서도 변방 중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청 황실 동물원에 코끼리를 기르고 있어서 이를 구경했다는 내용이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온다. 한국 유물 중 최초로 코끼리 관련 유물은 그 유명한 [[백제]]의 [[금동대향로]]이다. 금동대향로에는 다양한 인물상과 동물상들이 정교하게 빼곡히 조각되어 있는데 이 향로 하단 부분을 보면 코끼리를 탄 선인의 모습도 부조되어 있다. 살짝 녹슬었긴 했지만 작은 귀와 같이 아시아 코끼리의 신체적 특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또한 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부여군]]에서는 코끼리 얼굴 조각상 파편도 출토되었다. 이를 토대로 보았을 때 백제인들은 동남아와의 교류를 통해 아시아 코끼리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사]]에서 실제 살아있는 코끼리를 처음 언급한 기록은 [[신라]] [[소성왕]] 때 코끼리와 비슷한 [[이수약우|생물]]이 오늘날 [[강원도]] 지역에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정확히 "코끼리"라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외양 묘사를 보면 확실히 코끼리를 떠올리게 한다. >有異獸若牛, 身長且高, 尾長三尺許, 無毛長鼻. 自峴城川向烏食壤去. >소를 닮은 기이한 짐승이 있는데,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의 길이가 석 자 정도 되고[* [[삼국시대]] 당시 단위를 환산해서 계산하면 69cm 정도다.] 털은 없고 코가 긴 놈'''이 현성천에서 오식양을 향하여 갔습니다. >----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소성왕 2년([[799년]]) 5월, [[춘천시|우두주]](牛頭州) 도독의 보고 이 무렵 [[신라]]는 [[중국]]은 물론 서역의 [[이슬람]] 상인도 [[신라]]에 와서 장사를 했던 시기이므로, 아마 [[중국]]이나 [[아랍]] 등 외국 상인이 데리고 온 코끼리가 탈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중동]] 상인도 오고 역으로 신라 승려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인도까지 배를 타고 가기도 했는데,]] 중동이나 [[인도]]보다 훨씬 가까운 동남아시아에도 아시아코끼리가 서식하는만큼 한두 마리 데려오는 것 자체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이외에 [[https://youtu.be/2VbOEyo3Jo0|신라 코끼리 토우]]처럼 코끼리의 특징적인 코와 귀를 비교적 뚜렷하게 묘사한 유물도 있어, 적어도 코끼리를 실제로 봤거나 실제로 본 사람들에 의한 사실적인 정보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 외에 [[조선]] [[태종(조선)|태종]] 때 백제의 후손을 자처하는 [[일본]] [[오우치]]가문의 사신이 코끼리를 바쳤다는 것이 있다. 종은 [[아시아코끼리]]일 것이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으며 [[스펀지(KBS)|스펀지]]에도 소개되었다.[[https://youtu.be/lQs3UeJv9ig|#]] 그런데 공조(工曹)에서 [[판서|전서]]를 역임한 적이 있는 이우(李瑀)라는 양반이 '''[[인성질|코끼리를 못생겼다고 침을 뱉으며 비웃으며 놀리다가]] [[역린|순식간에 달려온 코끼리에게 밟혀]]''' [[압사]]한다.[* 전서는 조선 초기 육조의 핵심 직책으로 후에 판서로 불리는 직책이다. 현재로 지차면 [[국토교통부장관]]이 코끼리에게 죽은 셈이니 큰일인 셈이다.] >前工曹典書李瑀死。初, 日本國王遣使獻馴象, 命畜于三軍府。瑀以奇獸往見之, 哂其形醜而唾之, 象怒, 踏殺之。 >전 공조전서 이우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 당연하지만 [[천황]]이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아시카가 쇼군]]을 말한다.이 당시 쇼군은 [[아시카가 요시모치]].]이 사신을 보내 코끼리를 바치자 삼군부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는 소문을 듣고 구경 갔다가 그 꼴이 추하여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인 것이다. >---- >《[[태종실록]]》 [[1412년]] 12월 10일 야생 최강의 동물에게 개기니까 당연한 결말이기는 했지만.[* 한 학자는 코끼리가 이우의 말을 알아들어서 이우를 죽인게 아니라 당시 머스트를 겪고 있어서 난폭해진 상태였는데, 이우가 코끼리에게 함부로 가까이 갔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설을 제시했다.] 이에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사형에 처하라 하였으나, 임금이 "코끼리는 절을 잘하는 아주 예의바른 동물"이라며 형벌을 내리는 것을 거부하며 버티다가 결국 [[전라도]] 순천부 장도(獐島)로 귀양을 보냈다.[* 참고로 사람을 죽였다지만 아무튼 동물에게 벌 주는 상황이 코미디라고 생각했는지 왕이 웃으면서 따랐다고 되어있다.] 당시 순천도호부 소속이었던 현 [[여수시]] 율촌면의 장도로, 현대에는 율촌산단을 조성하면서 매립해서 육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코끼리가 울면서 단식을 하니 왕이 불쌍히 여겨 육지로 보내 [[전라도]] 일대에서 기르도록 하였다. 하지만 워낙 식성이 좋아 서울에서는 하루에 콩 4, 5말을 먹어치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재정이 딸린 지방에서는 하루에 쌀 2말, 콩 1말을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 대 들어서는 [[전라도]]의 재정으로 감당이 되지 않아 전라도 관찰사의 건의로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삼도를 돌며 키우게 했다고 한다. [[충청도]]에 있을 때 코끼리를 돌보는 종을 또 죽여 충청 감사가 다시 코끼리를 섬으로 유배하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역시 거절되었다. 이후의 기록은 없으며, 아마 삼도를 돌아다니다가 천수를 누렸으리라 추정된다.[* [[조선왕조실톡]]에서는 코끼리 대감이 두 명의 왕을 모셨다고 드립을 치는 위엄을 선보였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0년 5월 12일자 기사를 보면 코끼리 발을 사들이라고 [[연산군]]이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밖에도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가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크 제국]]의 [[카롤루스 대제]]와 동맹을 맺을 때 코끼리를 선물로 줬다고 한다. 카롤루스 대제는 이 코끼리를 아주 맘에 들어해서 태피스트리에 코끼리를 그려넣기도 했고 지방을 순시하기 위해 행차할 때마다 그 코끼리를 데려갔다고 한다. 서기 804년에 덴마크 왕 고드프리드가 덴마크 근처에 있는 프랑크 제국의 마을을 공격하고 마을 주민들을 납치해가자, 카롤루스 대제가 이를 정벌하기 위해 가면서 역시 이 코끼리를 데려갔고 여러 전투에서도 활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대제를 따라다니다가 차가운 라인 강물을 여러번 건너는 바람에 걸린 감기로 그만 810년 40살의 나이로 죽고 만다. [[https://www.elephant.se/database2.php?elephant_id=1814|출처]] 그 외에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도 코끼리를 길렀는데 이를 콘웰 백작을 맞이하는 퍼레이드에서 써먹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르네상스 시대 교황 [[레오 10세]]도 [[포르투갈]] 왕에게 선물받은 인도코끼리를 길렀는데 '한니발'이란 이름을 붙이고 교황 행차 때 항상 데리고 다니며 위세를 과시했고 코끼리가 병들어 죽자 성대한 장례를 치러줬다는 기록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