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르푸 (문단 편집) === 근대 === [[프랑스 혁명 전쟁]] 와중인 1797년, 베네치아는 프랑스에게 멸망하였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의 결과 코르푸를 비롯한 이오니아 제도는 프랑스령이 되었으나 1798-99년의 포위 끝에 오스만-러시아 군에게 함락되었다. 이후 코르푸와 이오니아 제도는 명목상 오스만 제국에게 귀속된 러시아의 보호국인 [[에프타니소스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전쟁으로는 못 얻었지만 명목상의 지배에는 성공-- 하지만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이오니아 제도는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고, 이에 영국 해군이 섬들을 함락시켰지만 코르푸는 프랑스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과 파리 조약으로 이오니아 제도는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그리고 코르푸가 그 위임통치령의 중심이 되었다. 1824년, 코르푸에는 첫 그리스 [[대학]]이 세워졌고 1864년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 빌헬름이 [[그리스 왕국]]의 [[요르요스 1세]]로 즉위하는 [[대관식]]의 선물로서[* 당시 영국 [[왕세자]] (훗날의 [[에드워드 7세]])의 아내가 요르요스 1세의 누나 [[알렉산드라 왕비]] (당시 왕세자비) 이다.] 이오니아 제도는 그리스의 영토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시기 코르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불가리아 왕국]]군에게 전 국토가 점령당한 후 그리스로 이동한 [[세르비아 왕국]]의 피난처가 되었고,[* 1915년 11월 23일 임시수도 프리슈티나가 함락된 후 [[페타르 1세]]를 비롯한 세르비아 지도부와 국민들은 500km를 가로질러 이오니아의 코르푸섬으로 탈출을 감행했고, 대후퇴(Great Retreat), 또는 알바니아 골고타(Албанска голгота)라는 이름의 탈출 결과, 아드리아해 해안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한 세르비아군은 12만 명, 피난민은 6만 명이었다.] 1923년에는 [[이탈리아 왕국]]이 [[그리스]]-[[알바니아]] 국경에서 피살당한 이탈리아 장군 텔리니의 죽음을 빌미로 그리스의 사죄 및 배상을 요구하며 섬을 폭격하기도 하였다. (코르푸 사건) [[2차 세계대전]] 시에는 1941년부터 이탈리아, 1943년부터는 나치 독일이 섬을 점령하였다. 이후 섬의 유대인들은 상당수가 살해되었다. 그리고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한 양동 작전으로 코르푸를 폭격하였다. 코르푸는 1944년 10월에 독일군이 철수하며 해방되었지만 1946년부터는 냉전의 전초전인 코르푸 해협 사건이 일어났다. (알바니아 군의 영국 함대에 대한 포격) 따라서 코르푸 일대가 기뢰밭이 되기도 하였고, 40여명의 영국 해병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코르푸 해협 사건]]이라 부르며[* 전 문단에 서술한 1923년의 [[https://en.wikipedia.org/wiki/Corfu_incident|코르푸 사건]]과는 다른 사건이다.], 국제법상 무해통항권과 통과통행권을 국제법적으로 다룬 첫 사례로, [[국제사법재판소]](ICJ)의 1호 판결이기도 하다. [[분류:그리스의 섬]][[분류:그리스의 세계유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